죽음

by Josh

이름 없는 산 속, 다 지워져가는 등산로 도중 어느 지점에서, 등산로 밖으로 한참 비켜가 풀숲을 뚫으며 내려가보자. 그렇게 조심조심 쌓인 낙엽들을 버석거리며 밟아 내려가 사면을 따라 깊은 골로 들어가자. 그러면 마찬가지로 이름따위 없는 거석들이 있다. 그 사이로는, 24시간 해도 비치지 않고 이 산이 만들어진 이래로 어떤 낙엽도 들어온 적 없는 곳에, 나는 나의 이야기들을 숨겨둔다. 그런데 용케도 거기까지 찾아와 나의 이야기들을 가져가는 다람쥐나 청설모가 있다. 그중 K시에서 사는 다람쥐를 만난 이야기다.



나는 작년 11월쯤 회사와 연계된 지자체에서 진행하는, 노인을 위한 사랑의 국밥 나누기 행사에 동원된 적이 있다. 그렇다고 내가 그 행사에서 회사를 대표한다거나, 연단 위에서 노인들의 화답 박수가 예비된 장광연설을 하는 위치는 아니었다. 스티로폼으로 칼라풀하게 만든 넓고 평평한‘사랑의 국밥 500인분’ 플래카드를 시장과 양 옆에서 들고 활짝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는 역할도 아니었다. 후배가 갔어야 했으나, 그의 갑작스러운 병가로 내가 대신 가는 자리였다. 사실 한명쯤 부재해도 상관 없는 병풍이었다. 그러나 윗분들은 대체자를 굳이 뽑았고, 나는 별 생각 없이 응했다. 관용차 운전을 하고, 사보 담당에게 보내줄 현장 사진들을 휴대폰으로 되는 대로 찍고(내 실력은 아주 형편 없다), 기념사진의 끝자락에서 무표정하게 나의 얼굴만큼의 공간을 제공하는 병풍의 자리.



그날은 갑작스러운 초겨울비가 내렸다. 오, 노벰버 레인. 나는 시큰둥했고 별 생각이 없었다. 지자체 공무원들은 좀 달랐다. 산성비라도 내리는 것처럼 비상사태에 처한 듯 보였다. 각자의 누군가들에게 보고를 하고, 휴대폰을 사정없이 두드리고, 국장인지 시장인지 하는 사람들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러더니 정말 대담한 책략을 개발한 전략참모처럼 뿌듯해하고, 자신들의 우수성에 감탄하는 듯하면서 인근의 공립 체육관 강당을 급조했다고 알려왔다. 그게 내 재앙의 시작일 수도 있다.



나는 죽은 물고기 눈을 하고 기계적으로 자리를 옮겼다. 회사가 얼마간의 돈을 지원하고(아마도 세제 혜택을 위한 것 같다) 지자체는 지방신문에 자랑스럽게 기사를 올린다.시장은 사람 좋은 옆집 아저씨 얼굴을 하고 10분 정도 국밥을 배식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연설을 하고, 다음 스케줄로 자리를 뜬다.‘사랑의 국밥 나누기’의 실질적이고 사전적인 행위 자체는 회사에서 돈을 받은 케이터링 업체에 의해 수행된다. 그 현장에서 내가 죽은 물고기 눈을 하고 기계적으로, 또 산발적으로 형편없는 사진을 찍는다고 해도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의 역할은 병풍을 대체하는 병풍이었고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도, 부당하게 비난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렇게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중간한 위치에 플라스틱 의자에 어정쩡하게 앉아서, 관차 키만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앉아있었다. 식사는 거절했다. 조금만 버티고 돌아가자. 일단 나는 근무 중인 것이고 여기에 대한 급료는 받고 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강당 안의 총체적인 불온한 기운을 피부와 코로 느꼈다. 위협받는 기분이 들었다. 노인들의 땀 냄새, 노인들의 귀 뒤와 정수리로부터 올라오는 특유의 누린 냄새, 노인들이 주로 피우는 담배 냄새, 죽음으로 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소주 냄새(소주를 제공하지는 않았는데)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맡는 것 같은 떡 냄새와 삶은 죽은 소의 냄새를 맡았다. 죽은 소를 끓이면서 나는 증기, 배식자에게 더 달라고 화를 내기도 하면서 잔뜩 받아온 것과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를 소주를 마시며 땀을 흘리는 노인들로부터 나오는 습기를 느꼈다.



아, 이건 그야말로 죽음이다. 와, 이건 진짜 죽음이다. 죽음은 낫을 들고 두건을 쓴 사신으로서 나타날 수도 있고, 검은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저승사자로 나타날 수도 있고, 생육이 시체가 되는 순간 그 자체로도 나타날 수도 있겠으나, 이런 뜬금없는 요소들을 갖춘 하나의 구조로 (나에게는 다소 위협적으로)나타날 수도 있는 거구나.



사실, 나는 재작년에 살해당한 상태였다. 그러나 세상은 나의 피살에 따른 죽음에 대해서는 별다른 배려를 하지 않았다. 나 자신한테만은 너무도 명백한 죽음은, 사회적으로 용납받는 형태의 죽음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열외를 인정받지 못한 병든 징집병처럼 그대로 군적에서 빠지지 못한 채 복무해왔다. 나는 죽은 물고기 눈을 뜬 빈 껍데기로서 충실히 기능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각과 촉각과 후각으로 치밀하게 구성되어 나에게 제시된 단막극 같은 이 죽음의 현장에서 나는, 깊은 곳으로부터 그 총체적인 죽음에 반응하고, 공명하고,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는 격렬한 운동을 느꼈다. 나는 그곳에서 단 1분도 더 있기가 힘들어졌다. 손에 일정한 식은 땀이 맺힐 때마다 검은색 코듀로이 팬츠에 손을 닦았다. 입술을 껌대신 잘근잘근 씹고, 되도록 눈을 감고 있었다. 입이 바짝 말랐다. 그럼에도 나는 병풍을 대신하는 병풍이어서, 그 정도의 움직임은 대외적으로 용인되었다, 아니, 나에게 별로 관심을 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도처에 죽음이다. 사람들은 삶은 죽은 소를 씹고, 노인들이든 케이터링 업체 직원들이든 공무원들이든 나같은 병풍들이든 어차피 시간에 흐름에 비례해 죽어가는 사람들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살해할 것이다... 일단, 그 연쇄살인마인 시간이 우리보다는 먼저 그 사랑의 국밥나누기 행사를 살해했다. 행사는 종료되고 나는 회사로 돌아갔다.



대강의 나머지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싱글 몰트 피트 위스키를 꺼내 한 잔을 자해하듯 마셨다. 당연히 피트향 위스키에서는 묘지의 냄새가 났다. 입었던 코듀로이 팬츠와 회색 면양말과 흰색 맨투맨 티셔츠와 회색 블루종 재킷을 세탁기에 넣고 서둘러 돌렸다. 그리고 바로 화장실에 기민하게 들어가, 시체를 염하는 장의사처럼 주의깊게 샤워를 했다. 닦이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유튜브 뮤직 프리미엄의 무작위 재생은 오아시스가 아닌 너바나의 노래만을 흘려보냈다. 두 번 비누칠을 하고 두 번 닦은 뒤, 나와서 세탁이 다 될때까지 두 번째 묘지맛 위스키를 천천히 마셨다. 세탁이 다 끝나자마자 모든 것을 건조기에 넣고, 최대한의 강도로 건조를 시켰다.



그리고 K시에 사는 다람쥐를 생각해냈다. K시에 사는 다람쥐와는 전자메일을 통해 세 차례 메일이 오갔다. 세 차례 모두 다람쥐가 나의 이야기 중 이해가 안 가는 것 몇 가지를 물어서 나는 거기에 대해 나름대로 답해주는 형식이었다. 그 대화의 형식에 그것 말고는 별다른 군더더기는 없었다. 그 신상에 대해 아는 것은 그가 K시에 사는 다람쥐이고, 호밀밭의 파수꾼은 읽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건조기가 완료되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세 번째 묘지향 위스키를 따르고 나름 절박하게 그에게 다음 날이 밝는 데로 호밀밭의 파수꾼을 주러 가도 되냐는 내용의 전자메일을 보냈다. 그동안 오갔던 세 차례의 전자메일은 바티칸 우체국에서 집으로 보내는 일반우편보다 더 느린 속도로 오갔다. 이번에도 같은 속도로 회신이 온다면, 답장은 내가 물리적으로도 사멸한 뒤에 부존재하는 수신인을 찾다가 디지털 세계의 어느 한구석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동안 4연속 너바나가 당첨되었다가, 비슷한 빈도로 린킨 파크가 나왔다가,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노래가 나왔다.



네 번째 위스키향 묘지를 마시고 있을 때 메일 알림음이 울렸다. 내일 점심 즈음, A시 공립문화회관 앞에서 한 시간 정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알았다고 하고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 날 연가를 올려달라고 연락했다. 그리고 다섯번 째 위스키모양 묘지를 마셨다. 건조 완료 소리가 들렸다. 원래 건조 완료 음악이 쇼팽의 녹턴이었나? 아니면 낫을 든 사신이 천장에서 부르는 콧노래였던가? 어쨌든 나는 건조의 완료에 안심하고 잠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나는 굴러다니던 나이키 조거팬츠와 타미 힐피거의 반집업 셔츠에 키움 히어로즈의 유광잠바를 주워입고, 두시간 반을 운전해 남쪽의 A시의 약속 장소로 갔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항상 10권 정도 사두고 있어서 잊지 않고 가져다줄 한 권을 챙겨두었다. 운전해 내려가면서 나는 일종의 구마의식처럼 오아시스의 노래만을 무작위 재생하도록 해두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보다도 인구가 작은데, 시라는 행정구역을 가진 것에 딱히 위화감은 없었다. 약속장소는 공립 문화회관과 공립 도서관과 같은 공립 건물들이 유니폼같이 붉은색 벽돌로 모여 있었고, 조경도 잘 되어 있었으며, 붉은 벽돌들과 벤치와 나무와 낙엽이 어우러진 작은 광장 같았다. 우스꽝스러운 조합의 복장의 내 눈에도 아름답기도 하고 초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10분쯤 지나서 다람쥐가 자신이 예고한 인상착의를 하고 나와서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공립건물 사이 작은 광장 옆에 가냘프게 붙어있는 노란 톤의 카페로 갔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그는 블루베리 스무디를 주문했다. 젊은 나이로 보이는 상냥한 여직원이 우리에게 직접 음료를 가져다주었다.‘뜬금없어서 놀랐어’ 다람쥐가 말했다. ‘내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내가 맥락이 없고 뜬금없긴 해. 뭐랄까, 죽기 전에 이 책을 주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어. 그렇다고 내가 당장 죽겠다는 게 아니야.’다람쥐가 나의 죽은 물고기 눈을 응시하면서 대답했다. ‘먼 길 왔는데, 밥을 사줄게.’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아니야. 밥은 먹고 왔어. 나는 이 책만 주러 온 거야. 별다른 건 없어. 그래도 역겨운 글들만 봐왔을 텐데 나름 멀쩡하게 생기지 않았니?’‘응, 확실히 멀끔하네. 나는 어때’‘딱 음습한 곳까지 음흉하게 기어와서 내 이야기를 훔쳐가는 다람쥐 같이 생겼어.’ 쥐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짓고 블루베리 스무디를 마셨다.



두 시간 반을 달려와서 책을 주는 행위는 단 3초면 끝난다. 아주 간단하다. 사실 나의 용건은 정말로 끝났다. 돌아가서 죽든 말든 그건 이제 내 사정이다. 그래도 나는 나 자신을 주의깊게 읽어줘왔던, 내 나름의 독자와 아름다운 광장 한 켠의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 그의 점심시간을 내가 독점했으니 나는 응당 거기에 대한 책임을 해야한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일단 의례적으로 물었다.‘그래서, 잘 지내? 내가 어떻게 거지같이 사는지는 내 이야기들을 보면 알 거고.’뜻밖에 다람쥐는 응분의 관례적인 대답 대신 굉장히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잘 지내지 않아.’



나는 조금 당황해서 다른 질문과 함께 그 대답을 되물었다.‘너는 K시에 사는 다람쥐인데, A시에서 만나자고 한 건 좀 의외였어. 내가 게이 스토커라도 될까봐 위치를 특정한 거야? 왜 못지내, 요즘에 힘들어?’ 다람쥐가 대답했다. ‘아니야. 너는 항상 위악적이지만 별로 무섭단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나는 힘들긴 해. A시에서 너를 만난 것도 같은 이유에서야.’‘무슨 사연이 있어서 K시에서 여기로 이주해왔다?’‘응 맞아. 나는 근처 A시청 복지과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회복지직 공무원이야. 나는 원래 K시 토박이고 K시에서 모든 학교를 나오고 K시에서 사회복지 공무원으로 근무했어. 이곳으로 전근해온 지는 두 달 정도 됐어. 그래도 다리 하나만 넘어오면 출퇴근할 수 있어서 크게 멀지는 않은 거리야.’‘괜찮다면 왜 이곳으로 옮겨왔는지 물어봐도 되니?’ 내가 말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절반쯤 벌컥벌컥 마셨다. 목이 말랐다.



‘사람 때문이야.’쥐가 말했다. ‘나는 K시에 있을 때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이 되는지 안되는지 판단하는 업무를 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 중 한명은, 내가 여러 가지 재산 목록을 조회해 보니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니고 부자였어.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의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을 박탈했어.’‘와, 아주 잘했네. 내 세금을 너가 그렇게 아껴주는구나.’다람쥐가 힘없는 웃음을 지었다. ‘아니야. 나는 아주 후회하고 있어. 그 사람은 알고보니 K시에서 아주 유력한 사람이었어. 아들 하나는 검사고, 아들 하나는 경찰이고, 또 조카는 변호사라더라고. 그리고 악성 민원인이었어.’ 다람쥐가 힘에 부친듯 숨을 고르고 다시 말했다. 나의 입이 바싹 말랐다. 나머지 절반의 아메리카노를 입에 부었다.



‘그 사람은 약 1년의 간격을 두고 사회복지 공무원을 타깃으로 해서 괴롭히는 걸로 악명이 높았어. 어느 부서로 가든지 만취하면 찾아와서 난동을 부리고 망신을 주는 거야. 그러면 그 직원은 그만두거나 휴직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새로운 타깃을 찾는데, 내가 그 사람의 아가리 속으로 제 발로 들어간 꼴이었지.’‘요즘 세상에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처벌받지 않을 수가 있나?’ 쥐가 어두운 미소를 지었다. ‘지방은 아직도 작은 국가랑 똑같아. 서울이랑은 달라. 그 사람은 말했다시피 자식들과 친지들과 함께 토호와 같은 것이고 그의 기초생활수급 신분은 특권과 같은 것이었어. 그리고 가끔 그 힘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공무원들을 괴롭혀왔는데, 내가 그 두가지 덫에 양 다리를 들이민 거야.’



‘아니, 너도 K시 토박이라고 하지 않았니? 너도 나름의 배경이 있고 뿌리가 있는데, 너를 도와주는 사람들은 없니? 그리고 시청에서는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거야?’다람쥐는 다 녹아 죽어가는 보라색 스무디를 쓰디쓴 약물처럼 마시고 대답했다.‘시청 사람들은 나의 편이 아니야. 그저 숨죽이고, 자신들이 다음 타깃이 되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내가 최대한 장기간으로 그와의 수성전에서 농성해주기를 바라고 있어. 그 기간 동안 그들은 안심하고 집에 돌아가 그들의 가족과 안락한 시간을 보내겠지.’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잔에 남아있는 얼음을 씹었다.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내 어금니가 깨지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내 가족은 아무 도움이 안 돼. 어부인 아버지는 물고기 말고는 관심이 없어. 어머니도 관심이 없어. 거기에 대해서는 유효한 이야기도 없거니와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아. 나는 장남으로 동생들을 내 공무원 봉급으로 키웠어. 그러니까 그건 정말로 별로 의미가 없는 이야기야.’ 다람쥐는 빨대로 반쯤 남은 보라색 스무디를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더 역설적인 건, 내 여자친구가 경찰이라는 거야. 그런데 말이야, 문제는 경찰도 K시 경찰이라는 거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그녀는 그냥 참으라는 말을 해.’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잔에 남아 있는 얼음을 모조리 어금니로 잘게 씹었다. 11월의 얼음 치고는 차가운 편의 얼음이었다.



‘그러니까, 시청 안에서의 문제제기도 불가능하고, 그밖의 관내 공기관도 그의 영향력 안에 있어서, 너가 도망해서 A시에 있는 거야?’‘응 맞아. 처음에는 휴직을 하고, 죽을 생각을 했어. 음 복수, 복수를 할 수 있지. 하지만 복수를 하면 내가 죽어야 해. 꿈을 자주 꿔. 내가 있는 사무실로 여느때와 같이 쳐들어온 술 취한 그 놈을 칼로 찔러 죽이고 교도소로 가는 꿈. 실제로 알아봤어. 퇴직하고 대출을 받으면 메가커피 하나는 운영할 수 있겠더라고. 그를 죽이고 나와서 메가커피를 하는 거야.’‘그런데 일단은 휴직을 먼저 해보고, 숙고한 뒤에 전근하는 걸로, 이렇게 타협을 보았다?’‘응. 인사교류를 해서 A시로 왔어. 이 곳의 사람들은 내 사연에 안타까워해주고 지켜주겠다고 해. 하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무서워. 바다를 가로지르는 큰 다리 하나로 도 단위가 달라지고, 다른 행정구역이긴 하지만, 이 인간이 나를 따라 이 대교를 건너와 나를 다시 괴롭힐 수도 있는 거니까, 불안 속 평화 같은 거야.’



그리고 그의 점심시간이 다 끝났다. 나는 순간 죽음과 같은 무력감을 느꼈다. 짧은 작별 인사를 하고, 주차장에서 내 차가 떠날 때까지 그는 나를 바래다주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홍성시의 이름 없는 리쿼샵에 샤르트뢰즈 옐로우를 팔기에 주저하지 않고 들려서 그것을 샀다. 나에게 주인은 멀리서 왔다고, 시골 다운 잔정을 보이며 데일리 와인을 서비스로 주었다. 속으로 나는 홍성시에도 토호가 있을까,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돌아오니 밤이었다. 생각해 보니 어제의 사랑의 국밥나누기 행사 이후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보니 다람쥐로부터 메일이 와 있었다.



안녕, 잘 돌아갔니? 네 차 뒤에 초보운전 스티커가 귀엽더라. 호밀밭의 파수꾼은 소중하게 잘 읽을게. 밥을 사줬어야 했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네 방문으로 큰 힘이 되었어. 네 말대로 그 사람이 이곳에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 안했는데 나, 콜드플레이 내한 콘서트도 당첨됐어. 너무 기대돼. 나는 그래도 잘 살아 나갈 거니까 너도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잘 살았으면 좋겠어.



나는 샤르트뢰즈 옐로우를 내 방 선반에 갖다두고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래에서부터 기포가 올라온다. 병입이 되고 나서도 시간에 따른 유효한 숙성이 지속되는 리큐르. 카르투시오회 수도사들 둘이 상보적으로 알고 있는, 연금술사의 비법노트로부터 유래된 비밀의 레시피를 무리하지 않는 양만 생산해내는 리큐르. 시체의 시간은 멈추었어도 이 병 안의 시간은 유효하고, 그건 올라오는 기포들로 나에게 시각적인 웅변을 한다.



아, K시의 그 악한이 A시에 오지 않았으면, 간절하게 생각한다. 복수를 해서 그가 죽어야 한다면 내가 죽어도 상관 없지 않을까. 어차피 죽을 바에아 값있는 죽음이 낫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나는 달걀을 삶아 다섯 개쯤 먹었다. 답장을 써야 할 텐데. 어차피 암묵적으로 우리는 즉답을 요구하지는 않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보고 답장을 써야겠다. 대신에 다람쥐가 굶지 않게 나의 이야기는 좀 써야겠다. 시체의 이야기라도 어느 정도의 도움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오만일 수도 있다.



달걀을 먹어도 배가 고파서 냉장고에서 생맥주를 꺼내 마셨다. 마시는 빵.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렇게 불렀다는데. 턱을 괴고 멍하니 있다가 건조기에 옷을 꺼내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옷가지를 꺼냈다. 정신병원에 가볼까. 정신병원에 가서 약을 타면 나아질 지도 몰라.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고 마음도 아프면 병원데 가면 되는 것 아닐까. ‘복수를 하려면 내가 죽어야돼’다람쥐가 말했다. 다람쥐가 평안하게 되기를 기원하면서 생맥주 한잔을 더 마셨다. 샤르트뢰즈 기포가 계속해서 올라왔다. K시의 악한에 분노했다. 11월의 밤이었다. 나는 다음 날 출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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