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다르게 유아 L이 깁스를 하고 등원했다. 넘어져서 다리에 금이 가 깁스를 한 것이었다. 당분간은 휠체어를 타며 생활해야 하기에 잘 부탁한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아이를 보살폈다. 생각보다 깁스를 오래 하기에 걱정되는 마음에 어머니께 여쭤봤다.
“어머니~ L 언제 깁스 풀 수 있대요??”
“선생님, 지금 우리 아이 아프다고 눈치 주시는 거예요.?”
날카로운 말에 당황했다.
돌봄교사를 할 때 겪었던 일이다. 돌봄교사란, 아침 8-9시, 저녁 5-7시 맞벌이 등으로 등원이 빠르거나, 하원이 늦는 유아들을 보육하는 역할이다. 등, 하원 시 학부모가 했던 말을 담임교사에게 전달하는 것도 나의 업무 중 하나이다. 내가 한 질문에 담임선생님이 어머니와 통화하며 오해를 해명하는 모습을 보며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돌봄교사를 할 때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다. 차라리 내가 책임지고 끝내면 다행인데, 나의 실수들로 인해 다른 선생님들이 피해를 보시니, 늘 죄송했다.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경솔하게 말했네요.”
“아니에요~ 엄마가 선생님들이 계속 반복해서 질문하니까, 조금 불편했나 봐요. 이미 다친걸로도 속상하고, 힘드니까.”
유치원에 계신 선생님들이 아이가 걱정되는 마음에 여러 번 질문했고, 반복되는 질문들에 어머니는 살짝 예민해지신 거였다. 아이가 아픈 것도 가뜩이나 속상한데, 계속 오는 같은 질문들이 불편했을 어머니의 마음도 이해가 가긴 했지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었다.
“어머니.. 저도 휠체어 생활을 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지금 얼마나 힘드시고 불편한지 잘 알아요.”
"선천적 고관절 탈구" 혹은 "비구 이형성증" 내가 가지고 있는 병명이다. 이 병은 출생 시부터 골반이 자라지 않아 다리를 다 덮지 않는 것이다. 내가 이 병을 처음 발견한 건 돌이 지나고 나서라고 들었다.
아이가 걷기는 하는데 가다가 넘어지고, 가다가 넘어졌단다. 동네에 대학병원 간호사로 근무하시는 분이 나의 모습을 보고 부모님께 병원에 갈 것을 권유해 드렸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고, 1살에 첫 번째 수술을 했다.
나에게는 전혀 기억이 없는 첫 번째 수술. 가지고 있는 기억은 1년에 한 번씩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서 진료를 받았던 것. 매년 겨울쯤, 엄마와 함께 서울을 가는 것은 즐겁기만 했다. 기차에 타서 카트 안에 간식을 사 먹는 것도, 지하철 카드를 삐빅- 찍는 것도 좋기만 했다. 매해, 병원 가는 날을 기다렸다,
그 해도, 어느 때와 같이 엄마와 손을 잡고 병원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익숙한 병원에 가서 접수하고, X-ray를 찍고, 내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얼른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풍선을 가지고 싶었다. 내가 병원 가는 걸 좋아했던 또 다른 이유는 병원 내에 있는 풍선 자판기 때문이다. 돈을 넣고, 원하는 색깔의 풍선을 고르면 기계가 움직이면서 풍선이 나왔다. 풍선은 되게 컸고, 헬륨가스가 들어있어 풍선이 쪼그라들 때쯤 그 헬륨가스를 마시고 이상한 목소리로 대화하는 게 재미있었다.
‘이따가 엄마한테 풍선 사달라고 해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나의 이름이 불렸고, 나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가 X-ray 사진을 이리저리 보더니 말했다.
"다시 수술해야 해요. 입원 날짜 잡읍시다. “
그때의 난 너무 어려서 수술이 뭔지, 입원이 뭔지 몰랐다. 그저 머릿속 가득 풍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엄마는 손에 한아름 서류를 들고 병원을 빠져나와, 집에 가는 기차 안에서 서류들을 읽었다.
"엄마 근데 왜 이 종이에 입원이라고 쓰여있어? 그게 뭐야? “
“집이 아니라 병원에서 사는 것을 말해.”
에? 나 싫어. 집에서 살고 싶어. 입원 안 할래."
"안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하는 거야."
"왜?”
그때까지도 나는 뭐가 뭔지 잘 몰랐다. 입원이 정확히 무엇인지, 엄마는 왜 표정이 어두워졌는지, 집에 도착해 아빠에게 말했을 때 "그러게, 바른 자세로 앉으랬잖아."라고 야단을 치는지, 알지 못했다.
입원 직전 주말, 토요일 날 가족들하고 다 같이 외식을 했다. 메뉴는 내가 좋아하는 돼지갈비. 아빠는 나의 앞접시로 고기를 많이 주셨다. 외식 후, 다 같이 노래방에 가기도 했다. 다음날은 아빠가 키즈카페를 보내주셨다. 주말 내내 엄마와 아빠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해주셨다.
입원날 아침, 온 가족이 서울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해, 짐을 풀고, 의사를 만나고, 엄마와 둘이서 병원에서 지냈다. 아빠는 수술하는 날 다시 오신다고 했다. 병원은 신기했다. 입원실은 진료만 보러 다니던 곳과는 다른 곳이었다. 어린이 병동이라 내 또래 친구들도 있어 옆에 있는 동생과 금방 친해져 같이 색칠 공부를 하면서 놀았다.
‘여기가 어디지? 아.. 나 수술이란 걸 했지.’ 차가운 공기 속 옆을 둘러보니 쇠로 된 침대 여러 개가 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간호사들. ‘아 왜 이렇게 답답하지. 나 일어나고 싶은데.’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기.. “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간호사가 다가왔다.
”저 좀 일으켜 주세요. “
”지금 못 일어나는데? “
”네? 일으켜 주세요. “
”지금 다리에 깁스해서 못 일어나. “
깁스가 무엇인지 몰랐다. 이따 엄마를 보면 일으켜달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신없이 분주한 소리 속, 내 침대로 한 남성이 다가왔다. 철컥. 소리가 나더니 침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나는 누워서 변해가는 천장 벽지만을 볼 수 있었다. 여러 개의 자동문을 통과하고 나가니 엄마, 아빠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기할 틈도 없이 엄마, 아빠가 나의 침대를 따라서 같이 움직였다. 익숙한 천장이 보이고, 따스한 공기가 느껴졌다. 입원실이었다.
어제까지 같이 놀이하던 동생이 ”언니다. 언니“하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고, 다시 철컥. 침대가 고정되었다. 여러 명의 의료진이 와 나의 이불 시트를 들어 입원실에 있는 침대로 옮겼다. ‘나 걸어가면 되는데 왜 그러지.’ 한번 더 의아했다.
모두가 다 떠나고 나와 부모님만이 만났다.
”답답하지? 엄마가 침대라도 올려줄게. “
엄마는 손잡이를 돌려 나의 상체가 일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때야 난 나의 다리를 보았다. 허리부터 발끝까지. 하반신 전체에 깁스하고 있었다. ”이게 뭐지? “ 싶었지만, 충격을 받지도, 심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냥.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때의 난 10살이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기엔 턱없이 부족한 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