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김소원이다!

by 김소원

2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고, 여전히 깁스를 하고 있었다. 집에서도 병원에서처럼 누워만 지냈다. 병원에서는 공용텔레비전이기에 내가 보고 싶은 것들을 마음대로 못 보지만, 집에서는 내가 볼 수 있는 채널들을 마음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렇지만 밥도, 화장실도 누워서만 해결해야 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던 차에 아빠는 나의 답답함을 덜어주셨다.


”내가 공부는 못했어도 잔머리로 여태껏 인생을 살아왔어.“


아빠가 늘 하시던 말씀이었다.


집에는 굉장히 오래된 의자가 하나 있었는데, 리클라이너가 되는 의자였다. 그 시대에, 우리 집 형편에 그런 좋은 의자가 어떻게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의자는 나의 투병 생활의 질을 한층 더 높게 해주었다. 깁스한 나의 몸을 거기에 눕히고, 깁스 부분만을 조심해서 밧줄로 감으면 몸이 고정되었다. 그 상태로 버튼을 눌러 의자를 조절하면, 보통의 사람처럼 앉을 수 있었다.


또, 내 생활의 질을 높여준 것 중 하나는 씻기였다. 아무리 깁스했어도 틈이 있었기에 물이 들어가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늘 세숫대야에 얼굴만을 씻었기에 머리를 감을 수도, 상체를 씻을 수도 없었다. 덕분에 나는 꼬질꼬질해졌다. 그런 나를 보고만 있을 딸바보 아빠가 아니었다. 아빠는 어느 날 큰 비닐봉지를 구해오셨다. 그러고는 접이식 책상을 화장실에 두고, 나를 눕혔다. 비닐봉지로 내 몸의 깁스를 한 부분을 칭칭 감으셨다. 어느 곳에도 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그리고 씻기셨다. 덕분에 나는 간만에 상쾌한 기분을 맞이할 수 있었지만 너무 힘과 시간이 들었기에 매일 씻을 수는 없었다. 주 1회. 엄마, 아빠에게 나의 씻기는 숙제가 되었다.


아빠의 잔머리 덕분에 그나마 인간다운 생활을 조금씩 할 수 있었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게. 적응한 듯. 적응되지 않게, 꽤 길게 느껴지는 그 시간들이 흘러갔다.


”소원아~ 오랜만이다. 너 근데 되게 깨끗하다. 다른 아이들은 다 씻지 못해 힘들어하던데 너는 어떻게 씻었니?“


3달 만에 만난 의사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다. 드디어 깁스를 푼단다. ‘이 답답한 깁스가 벗어지는구나. 그럼, 예전처럼 다시 걸어 다니고, 뛰어다닐 수도 있고, 그러겠지? 친구들이랑 숨바꼭질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고. 학교도 갈 수 있겠다!’ 무척 들떴다.


한 선생님이 전기톱을 들고 오셨다. 통깁스였기에 큰 톱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드르르르르르륵“ 몇 번의 소리가 반복되더니 나의 깁스가 사라졌다.

야호! 나 이제 걸어 다닌다!


”어? 왜..“

다리에 힘이 없었다. 걷기는커녕 일어설 수도 없었다. 의사 선생님이 아직은 좀 더 누워있어야 한다고 했다. 11살의 아이에게 그 말은 오늘 하루만 자고 나면 내일부터는 걸을 수 있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다음날부터 물리치료가 시작되었다. 휠체어에 탄 나를 엄마가 밀어서 병원 1층에 있는 물리치료실로 갔다. 처음 한 물리치료는 나를 설 수 있게끔 하는 것이었다. 침대에 눕히고, 찍찍이로 나를 고정하고, 리모컨으로 조정하여 나를 서게 했다. 익숙했다. 집에서 늘 아빠가 나를 의자에 앉혀서 해주던 거였다. 아빠의 잔머리는 딸의 빠른 쾌유를 돕기도 했다.


하나 다른 게 있었다면 내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었다. 누군가는 목발을 짚고 있었고, 누군가는 몸에 여러 기계를 대고 있었다. 누군가는 손을, 누군가는 허리를, 누군가는 어깨가,, 다들 자신의 아픈 부위가 조금이나마 나아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처음 보는 장면들이었다.


물리치료는 생각보다 길게 이루어졌다. 매일 아침 가야 했다. 점차 걸을 수 있도록 치료가 진행되었다. 목발이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냥 짚으면 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목발도 사용하는 방법이 있었다. “아픈 다리와 목발이 먼저 가고, 그다음 다리가 오고..” 10년을 걸어 다니다 고작 몇 개월 못걸었을 뿐인데, 다시 걷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그중 가장 어려웠던 것은 계단이었다. 네 발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은 힘겨웠다. 또, 오를 때와 내려갈 때의 목발 사용 방법이 달라서 헷갈렸다. “학교에 가면 계단이 많잖아. 연습 많이 해야 해.” 물리치료사 선생님이 말하셨다. ‘그렇구나. 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구나.’ 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을 오르내렸다.



“어?! 김소원이다!”


친숙한 얼굴들이 나를 반긴다. 4개월 만에 다시 돌아간 학교였다. 그해부터 학교의 규칙이 바뀌어 2년 단위로 반 아이들을 바꾸는 제도가 신설되었다. 고로 3학년 때 만났던 친구들과 동일하게 4학년에 올라갔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적었다. 다만, 목발을 짚고 학교생활을 해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었을 뿐. 학교는 익숙한 듯 낯설었고, 낯선 듯 익숙했다. 친하지 않았던 친구들도 오랜만에 보니 반가웠는지, 먼저 다가와 줬고, 목발을 신기해하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친구들은 작년과 동일했지만, 선생님은 달라지셨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 처음 본 담임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소원이 오늘부터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되었어. 다만, 목발을 짚고 있어 불편한 점들이 있을 테니 너희가 많이 도와줬으면 좋겠다. 소원이 급식소 가는 게 불편할 것 같으니, 밥을 가져다줄 친구 2명 정도가 필요하면 좋겠어. 누가 해줄래?“


”저요, 저요!“


여기저기서 소리쳤다. 손들은 아이 중 2명을 선생님이 골랐고, 그 두 명의 친구가 앞으로 나의 밥을 교실로 가져다주기로 했다. 선택받지 못해 아쉬워하는 친구들을 보며 학교 생활 잘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다가 올 일을 모른채 행복했다.



[나머지 공부: 김소원]

칠판에 내 이름이 적혀있다. 디폴트값이다. 4개월 만에 간 학교, 이미 진도를 나간 친구들. 따라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원래도 공부를 잘 하지 않았던 나는, 더욱 더 뒤쳐졌다. 성적이 안 좋은 건 견딜 수 있었는데 나머지 공부가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선생님은 수업 시작 전, 매일 질문을 했고,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 아이들을 나머지 공부를 시켰다. 선생님은 매일 나에게 물었고, 나는 매일 대답을 못 했고, 매일매일 나머지 공부를 했다.

칠판에 적힌 내 이름은 창피했고, 친구들과 같이 하교하여 떡볶이도 먹고, 오락도 하고 싶었다. 남아서 하는 공부는 더 어렵게 느껴졌으며 매일 통과를 해야 집에 갈 수 있는 그 과정은 고난이었다. 병원 생활을 하며 그리웠던 학교였지만 점점 가기 싫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를 도와주던 두 명의 친구도 지쳐가기 시작했다. 순번을 정하여 돌아가는 것이 아닌 고정적으로 두 명의 친구만 나를 도와주고 있었으니 지칠 만도 했다. 신발 정리와 식판 받기 등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늘어갔다. 두 발에서 네발이 된 만큼, 어려운 일들도 배로 늘어났었다.


2학기부터는 목발 없이 다른 아이들과 같은 방식으로 걷기 시작했지만, 방법이 같아졌다고 관계도 같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무리지만 무리가 아닌, 혼자인 듯 혼자가 아닌 채 학기를 마쳤다. 내 인생 최악의 학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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