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수렁 속에서 깨달은 사실 하나

by 김소원

2018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 소망은 올해는 꼭 합격하게 해주세요.


수술을 받기 전까지 한 달의 시간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수술을 받았던 10살의 나와는 달랐다. 이제는 수술 후, 내가 겪어야 할 일들에 대해 안다. 문구점에 가 학용품을 잔뜩 샀다. 움직이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였다. 책도, 노트도 우선 다 쟁여놨다. 엄마와 쇼핑도 자주 다녔다. 엄마도 아셨다. 수술 후 딸이 얼마나 답답하고 힘든 생활을 보낼지를, 그것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주말마다 엄마와 나가 맛있는 것을 먹고, 쇼핑했다. 친구들에게도 말했다.


“불합격했고, 수술하게 되었어. 이 수술은 원래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것이고, 그것이 재발했으며 꼭 받아야 하는 것이고, 사실 작년에 받아야 했는데 내가 미뤄둔 것이고 그래서 불합격은 내가 아파서 공부를 못 하게 된 것이고, 취업도 마찬가지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며..”


구구절절 나의 상황들을 설명했다. 나는 그냥 놀기만 하는 백수와는 다른 상황이라고, 이 상황들이 해결되면 나는 평범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나는 지금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술 전까지, 공부를 놓고 있을 수 없었다. 수술하고 나면 보통의 수험생들처럼 공부에만 몰입할 수 없을 테니 그 간격을 메꾸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열심히 해야 했다. 매일 6시에 일어났다. 수술 전까지 바짝 해둘 생각이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엄마는 시간도 많은데 쉬엄쉬엄하라고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가뜩이나 지금 내 시간은 남들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데, 수술하면 더 격차가 심해져 예전처럼 또다시 친구들은 다 가고 홀로 남은 교실에서 공부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기 싫어서, 친구들과 같이 하교하고 싶어서 이를 악물었다. 절대 뒤처지지 않는다. 남들과 똑같은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병원에 도착했다. 환자복을 입고, 각종 검사를 받는다. 저녁이 되어서야 숨을 좀 돌릴 수 있었다. 병원에서도 공부는 계속되었다. 여러 권을 바리바리 싸가봤자 다 보지 못할 게 분명했다. 나는 조절을 잘하는 수험생이기에 한 권의 책만을 가져가기로 했다. 공부하다가 잠깐 쉴 겸 주위를 돌려봤다. 아이들이 있었다. 자신의 손보다 큰 링거를 맞고 있는 주제들에 뭐가 그리 좋은지 옹기종기 모여 하하대고 웃는다. 지금은 손바닥만 한 링거가 무겁겠지만, 앞으로 그 무게들은 더 커지고, 무거워지겠지. 저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수술 날 아침이 밝았다.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누운 채로 수술실을 향해 가고 있다. 수술실 문 앞에 서자, 누군가가 “보호자는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한다. 엄마, 아빠와 마지막 인사를 하고, 차가운 공기가 느껴지는 수술실 안을 홀로 들어간다. 마취하기 전에 의사는 혹시나 벌어질 의료사고를 대비하여 성함, 나이, 받게 되는 수술 등을 묻는다. 그 후 “마취 들어갑니다. 10초만 세세요.”라고 말한다. 난 그 10초 사이에 그냥 이대로 눈을 뜨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내 깊숙한 곳에 깔려 있던 진심이었다. 불합격도, 수술도 잘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무서웠다. 수술 후 겪게 되는 그 고통은 내 몸의 흉터와 뇌가 기억하고 있는데, 이것을 또다시 겪어야 하는 상황이 서러웠다. 내 눈앞에 놓인 모든 상황이 엿같았다. 그러니, 그냥 차라리 이대로 잠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눈을 뜨니, 부모님이 눈앞에 계셨다.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고 한다. 내 눈을 보자 엄마가 말하셨다.


“건강하게 낳아주지 못해 미안하다.”


나의 기억 속에는 두 번째 수술이지만, 부모님에게는 세 번째 수술이었다. 걷지도 못했던 아기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10년 주기로 찾아오는 딸의 고통에 죄책감을 느끼고 계셨다. 엄마의 말에 다시 한번 열심히 살아보자고 다짐했다.


2주 간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의술이 발달한 덕에 예전처럼 깁스는 하지 않고, 곧바로 휠체어를 탈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10살 때보다 3배는 늘어난 내 몸짓에 깁스까지 해놨다면.. 어휴, 나도, 식구도 모두 고생했을 것이다. 언제까지 엄마, 아빠가 나를 병간호할 수는 없었기에 출근하셨다. 평상시에는 혼자 있는 집을 좋아했다. 그런데, 휠체어를 탄 채로 집 안에 있는 것은..


집 안이래도 모든 곳을 갈 수는 없었다. 베란다를 나갈 수 없었고,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휠체어를 고정하고, 벽을 잡고 무거운 몸을 든 채 변기에 앉아야 했다.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었다. 요리할 수도 없었기에 엄마는 늘 식탁에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차려놓고 가셨는데, 상하지 않는 음식을 내놓아야 했기에 먹을 수 있는 것들이 한정적이었다. 비빔밥과 컵라면을 자주 먹었고, 떡과 과일, 빵으로 배를 채울 때도 많았다. 한번 움직일 때마다 휠체어의 바퀴 소리가 요란했지만, 공간은 적막했다. 그때 나는 외로움을 넘어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사람이 그리워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도 “야, 부럽다. 나도 좀 쉬고 싶다.”라는 말이나 돌아왔다. 내면에서 분노가 끓어올라 왔지만, 어느 상황에서도 감사함을 느끼라는 어른들의 말을 되새겼다. 그래, 배를 채우고, 공부를 하는 것은 작년과 변함이 없다고, 나는 이 순간만 버티면 되지만, 누군가는 평생 휠체어와 한 몸일 것이라고, 나약해지지 말자고. 나 정도면 충분히 행복한 것이라고 다독였다.


여름이 되었고, 난 드디어 휠체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목발을 사용하자 이제야 좀 사람답게 사는 것 같았다. 서서 씻을 수 있는 것, 동네를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것, 편의점을 갈 수 있는 것. 뺏겼던 무언가를 되찾은 느낌이었다. 당연했던 모든 것들이 다시 당연해졌다.


1차 시험까지 5개월가량 남았다. 다시 예전의 패턴으로 공부해야 했다. 사실 수술을 하고 나서부터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수술 후, 몸도, 마음도 엉망이었다. 그때 난 깨달았다. 육체가 정신을 지배한다. 아무리 정신을 부여잡고, 커피를 때려 부어도 집중 시간은 1시간을 넘지 못했다. 그지 같은 우울이 내 몸에 덕지덕지 붙어서 떨어지지를 않았는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면서 우울이 하나, 하나씩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제 완전히 걸을 수 있게 되면 모든 우울이 다 없어지고, 예전처럼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아니, 그래야만 된다고 다짐했다.




“1차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이 문구를 두 번째 보았고, 또 한 번 절망했다. 그리고.. 꽤 시간이 흐른 뒤에 이때 했던 선택들을 후회했다. 우선은 치료에 집중해야 했다. 수술 전에도, 수술 후에도 공부를 놓지 못한 것이 제일 후회된다. 공부를 미뤄두고 내 몸에만 집중하면 더 이른 시일 내에 나았을 것이고, 공부의 효율도 올라갔을 것이다. 그때의 난,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자고 다그쳤지만, 힘들 때는 힘이 들어야 함을, 파도 속에서 어설프게 발버둥 쳤지만 실은 더 깊은 곳으로 가야지만 수영해서 나올 수 있었다. 내 수험생활 중 가장 아프고, 처절했던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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