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책임한 격언 따위에 저 바다를 호령하는 거야.
1차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어?, 어?, 어어어어어어 합격이다. 합격했다.
너무 긴 시간 불합격만 해서 낯선 글자들의 향연에 얼떨떨했다. 정신을 차리고 커트라인과 나의 점수를 비교했다. 합격선에서 2점 높았다. 1차에서 고득점을 맞아야 2차가 유리했기에 점수 차이가 아쉬웠다. 떨어질 때도 매번 1, 2점 차이더니 붙을 테도 2점 차이네 싶었다.
어쨌든 기회가 주어졌으니 잡아야 했다.
수험생카페를 통해 나를 포함 3명의 스터디그룹이 만들어졌다. 남들보다 빨라야 했기에 발표날 당일 스터디원끼리 모여 계획을 세웠다. 자기소개를 하는데, 갓 대학을 졸업하고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들이라 다들 나보다 어렸다. 그제야 어느덧 26살이 되어버린 나의 현실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취업해 1정*을 따고 대학원도 졸업하는데, 5년 전이나, 5년 후나 변함없이 나이만 먹어가고 있는 나 괜찮은 걸까라는 생각에 빠질 여력도 없이 출신학교를 공유하였다.
다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대학들을 나왔는데, 특히나 스터디원 중 한 명은 유아교육계에서 유명한 학교를 나와 이미 공립유치원 현장에 많은 선배들이 있어 끊임없이 소통하였다. 선배들을 통해 얻은 자료, 시험 정보 등을 우리에게 공유해 주는 것이 고마웠지만 처음 느껴 보는 씁쓸함이었다. 내 대학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창피한 느낌과는 달랐다. 대한민국은 학연, 지연, 혈연만 있으면 먹고살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말에 근거를 본 듯했다.
스터디를 진행할수록 면접은 어느 정도 감이 잡히고 자신감이 생기는데, 수업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유아들과 함께 수업을 해본 건 실습 때가 마지막이었고, 그것은 어언 5년 전이었기에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차라리 나 스스로가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해서 실행하는 수업이었으면 나았을까.
이미 정해진 수업 주제와 채워야 하는 조건들은 나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유치원은 아이들의 흥미가 중요하기에 아이들이 흥미 있어하는 주제를 토대로 교사가 수업을 지원해 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실제 아이들과 대화해 본 적도 오래전이기에 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새로운 물건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등에 대한 데이터가 전혀 없었다. 수업 실연은 연습할 때마다 늘 나만의 방백으로 끝이 났다.
사실, 스터디를 할수록 내가 생각하는 방법들과 스터디원이 원하는 방법에 차이가 큼을 느꼈지만 난 합격하려면 꼭 스터디를 해야 한다는 강박과 중간에 그만두면 민폐라는 생각에 차마 그만두지 못했다. 다행히 K가 있었기에 스터디에서 부족하다고 느낀 점들을 K에게 물어보며 피드백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스터디원 모두가 다 같이 붙는 게 베스트이지만 만약 불합격자가 존재한다면 그건 나는 아닐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2차 시험 당일이 되었다. 2차 시험은 이틀로 나눠 보기에 시험을 보는 지역에 사시는 친척 집에 온갖 짐을 들고 갔다.
첫날은 면접이었다.
구상실에서 구상지를 보는데, 종이 가득 빽빽이 차 있는 글자들에 놀랐다. 메모조차 할 곳이 없어 시험지의 온갖 빈 곳을 찾아다니며 꾸역꾸역 답변을 적었다. 구상실에서 구상을 마치고, 시험장에 들어가는데 그렇게 연습했던 "안녕하십니까 관리번호 0번입니다"를 "안녕하세요"라는 말로 시작했다. 애써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말하며 생각했다.
‘이분들도 사람이야! 그깟 인사말 하나 다르다고 점수를 안 주지 않을 거야.
밀고 가자 당당해지자!’
유독 한 면접관분이 나를 무서운 눈빛으로 보셨는데, 면접관은 일부로 차갑게 대하더라는 카더라를 들었던 적이 있어서 그분께 나도 눈빛으로 보냈다. "지금 일부로 그러시는 거죠? 다 알아요~ 제 대답 들리시죠?"라고. 그렇게 뻔뻔한 면접을 끝내고 나왔다.
시험 직전까지도 수업실연에 대한 감을 전혀 잡지 못해 걱정이 많았다. 면접을 마치고, 학교를 나오면서 내일 있을 수업실연 생각밖에 안 했다. 하루도 안 남은 시간 동안 새로운 것을 하기보다 그간 내가 했던 수업을 돌아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연습하며 찍어둔 영상들을 보며 하나하나 차근차근 돌아봤다.
다음날, 구상실에서 시험지를 보는데 내가 그나마 자신 있는 유형이 나와 안도했다. k에게 두 번이나 피드백을 받은 유형이고, 시험 직전 스터디원들한테 좋은 평을 받기도 한 유형이다. 다행이라는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수업을 마무리하고 나왔다.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어느덧 교사 경력 3년 차가 된 S와 전화를 하며 내가 한 수업 실연들에 대해 공유했다.
“이거는 괜찮고 이거는 감점일 것 같은데?”
"아 몰라. 이미 끝났어! 내일 대체교사 갈 준비나 하자"
S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집에 도착했다. 그 와중에도 난 성실했기에(미련한 건지) 대체교사를 구해 시험 바로 다음 날부터 2주 동안 출근했다. 일을 할 때만큼은 시험 생각이 안 나서 좋았다.
2차 발표날.
집에 온 식구가 다 있어서 차마 집에서 볼 자신이 없었다. 친구도 출근하고 없는 자취방에서 혼자 발표 창을 열었다.
“최종 합격”
자 명단에 없습니다.
그럼 그렇지.
최종 합격이라는 네 음절에 설레었던 그 1초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스터디원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두 명 모두 합격했다.
책상 앞에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고 써붙인 포스트잇이 너덜너덜해져 있다.
5년 전, 처음 임용고시를 시작할 때 붙여놓았던 것이다.
“거짓말..”
뜯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최종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그 문장은 세상에 너의 자리가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표 속에 정렬된 합격자 이름들, 그 속에 포함되어 딱 표 한 칸만큼만 자리 잡고 살겠다는데, 쉽지 않았다.
*1정: 1급 정교사의 준말로 교원의 자격증을 뜻한다. 자격 기준은 다음과 같다.
(유아교육법 제22조 교원의 자격)
1. 유치원 정교사(2급) 자격증을 가진 자로서 3년 이상의 교육경력을 가지고 소정의 재교육을 받은 자
2. 유치원 정교사(2급) 자격증을 가지고 교육대학원 또는 교육부장관이 지정하는 대학원의 교육과에서 유치원 교육과정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은 자로서 1년 이상의 교육경력이 있는 자
*면접은 구상형과 즉답형으로 이루어져 있음. 구상형의 경우 구상실에서 문제지를 주고 일정 시간 동안 구상을 한 뒤, 고사장으로 가 답변을 함. 구상형에 대한 대답 후 그 자리에서 바로 문제를 보고 답하는 것이 즉답형임.
*수업 실연은 구상실에서 문제지를 주고 수업을 계획할 시간을 준 뒤, 고사장으로 가서 면접관들 앞에서 실연해야 함.
*시험시간과 면접문항 수는 지역마다 다르며, 매해 약간씩 변동이 있음.
* 소제목은 잔나비의 "꿈과 책과 힘과 벽"의 가사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