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똑똑, 타도 되나요?
- 어디로 가시나요?
- 00동이요.
- 타세요.
신호에 멈춰서 있던 택시를 탔다. 빨간불에서 파란불로 바뀐다.
- 00동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 우와, 저 이런 말씀하시는 기사님 처음 봬요.
- 하하, 어렵게 시작한 일인데 열심히 해야죠. 제가 이래 봬도 전 직장에서는 왕고참이었어요.
그 말에 용기가 생긴다.
- 저도 이번 시험에 떨어졌어요. 벌써 4번째예요.
- 인생이 단 1%만 내 뜻대로 되어도 좋을 텐데 그 1%가 참 어렵죠?
누가 맷집이 생긴다고 말했을까, 많이 맞으면 맞을수록 견딜 힘이 생길 거라고 누가 그랬지, 4번이나 불합격을 겪어도 아팠다. 정말 무지하게도 아팠다.
도대체 뭘까?
내 뇌를 지배하던 의문이었다. 다른 장수생들은 적어도 1차는 한두 번씩, 합격하던데 나는 아니었다. 나한테 문제가 있음을, 단순히 운이 없어서 불합격한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처음으로, 나의 공부 방법을 의심해 보기 시작했다. 유튜브로 공부 방법에 관한 영상들을 찾아보고, 관련 책도 읽으며 분석했다. 애석하게도 나의 공부 방법에 문제가 많았다. 나의 가장 큰 문제는 계획의 구체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저 이론 공부, 문제 풀기만으로 계획을 세웠는데, 이론 공부와 문제 풀기 안에서도 세부적인 계획이 필요했다. 또한 강의 커리큘럼에 따라 상반기는 이론공부, 하반기는 문제 풀이 공부만을 했는데 그래서도 안되었다. 공부는 매일매일 인풋과 아웃풋이 이루어져야 했다. 더 이상 강의에 의존하지 않고, 독학하기로 했다.
학생 때부터 성실했다. 그 싫었던 나머지공부도 울면서 꾸역꾸역 다 했고, 성적은 안 나왔어도 숙제는 꼭 해가는 학생이었으며 야간자율학습이 정말 자율로 바뀌던 시대의 고등학교에 다녔음에도 야자를 포함, 토요일 자습까지 다 했다. 그렇게 열심히 살면 선생님들은 항상 칭찬해 주셨다. 다행히 성적보다는 나의 성실성을 평가해 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임용고시도 열심히만 하면 합격하리라 생각했다. 나의 열심을 알아주는 사람이 늘 있었으니까, 이 시험도 실력이 부족하더라도, 나에게는 강력한 성실성이라는 무기가 있기에 합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공부 방법의 문제점들을 발견하며 단순히 열심히만 한다고 합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튜브나 공부 방법 책에 있는 내용들은 모든 공부에 통용되는 내용들이 있기에 약간의 답답함이 있었다. 유아교육을 아는, 무엇보다 이 시험의 체계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과의 대화가 고팠다. 여러 사이트를 뒤지던 중 유아임용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블로그를 발견했다. 운영자인 K는 몇 년 전 유아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교사생활을 하며 틈틈이 블로그에 자신이 수행한 공부 방법을 올렸다. 재능 기부로 수험생들을 멘토링하거나 강연하였고, 교사보다는 멘토링이나 강연하는 것에 더 재미를 느껴 의원면직하고,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교육사업을 시작한다고 했다. K를 만나지 않고, 스토리만 들었을 때는 화가 났다. 아니, 그 좋은 곳에 들어가 놓고 제 발로 나온다고? 배부른 사람이구먼. 싶었다. 삐딱한 마음이 들었음에도 합격이 간절했기에, 멘토링을 신청했다.
*의원면직: 공무원 자신의 사의(辭意) 표시에 의하여 공무원 관계를 소멸시키는 행위.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의원면직(依願免職) (교육학용어사전, 1995. 6. 29. 서울대학교 교육연구소)
k는 멘토링 전 사전 제출자료를 주었는데, 그 종이에는 그동안의 응시 횟수와 공부 방법, 내가 생각하는 불합격의 원인, 체크리스트 등이 있었다. 응시 횟수를 적을 때 내면에 있는 깊은 수치심이 올라왔다. 이것을 본 k가 꼭 비웃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거짓으로 작성할까도 싶었지만 간절함이 수치심을 이겼기에 5년째 도전 중이라고 작성했다.
멘토링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그때의 나에겐 어떠한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집에서 할 수 있는 온라인을 선택해 당일 날, 화상통화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k는 그동안 내 공부법을 보며 잘한 점과 부족한 점을 알려주었다. 나를 향한 옹호도 비난도 없이 사실만을 전달하였다. 무엇보다 작년 나의 시험지를 보며 한 문제, 한 문제 틀린 이유와 보완할 점을 알려줄 때 그동안 나의 갈증은 해소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되는 서술형 시험은 전부 답안을 공개하지 않는다. 임용시험도 서술형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제만을 공개하기 때문에 수험생들은 정답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간 어떤 것이 맞는지, 내가 쓴 답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지 혼란스러웠는데, k는 자신의 주장만이 아닌 전공책, 논문 등 근거를 가지고 와 설명해 주었다. 그 모습에 신뢰감이 갔다. 어린 시절, 과외를 받았을 때의 기분과 동일하였고, k와 함께라면 합격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k의 멘토링을 연달아 신청하였고, 한 달에 한 번씩 k를 만날 수 있었다.
하반기가 되었고, 시험이 다가올수록 풀어가는 문제 수도 늘어났다. 문제 풀이 역시 그저 문제만 풀어서는 안 되었다. 그전까지는 문제를 풀고 틀린 것을 그저 공부만 했었는데, 틀린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분석해야 했다. 이해나 암기가 부족한 것인지, 문제를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인지, 실수인지, 실수라면 반복해서 나타나는 실수는 무엇인지 등을 정확히 분석했다. 그전까지는 점수가 나오지 않으면 슬퍼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틀린 게 많이 나올수록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장에서 실수할 확률을 줄일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헷갈리거나 모르는 것은 k에게 물어봤다.
k는 “저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부분이라 찾아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라는 말을 숨기지 않고 하였다. 그러고는 항상 자료를 첨부하여 내가 이해가 갈 때까지 설명해 주었다. k는 그간 살면서 나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수많은 사람들과는 다른 향기가 났다. 나의 공부도 이전과는 달랐다. 단순히 “공부한다.”의 행동이 아닌, 뇌가 공부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렇게 1차는 합격할 것이라는 감이 왔고, 2차 준비도 함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험생활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1차와 2차를 함께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1차 합격이 되어야 2차도 볼 수 있었기에 1차 시험 전까지는 가볍게 일주일에 한 번 유튜브나 대학교 교재를 통해 실제 교사들의 수업 영상, 계획표를 찾아보았다.
시험 날이 되었다. 여느 해와 같이 올해가 부디 마지막이길 바라며 들어간다. 1교시는 논술이다. 60분 동안 한 페이지 가득한 사례를 읽고 요구하는 문제에 대해 약 1200자 내외로 적어야 한다. 작년 시험에는 생소했던 이론이 나와 어려웠는데 올해는 지난 시간 동안 수도 없이 공부한 부분에서 나와서 쉽게 풀었다.
2교시는 교육과정 A가 시작된다. 8개의 큰 문항들과 그 속에 있는 24개 정도 되는 문제들을 70분 동안 서술형으로 답해야 한다. 1번 문항에 처음 보는 유형으로 문제가 나와서 10분이나 소비되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장수생 짬밥으로 1번은 항상 어렵게 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진짜 시작은 2번 문항부터니까. 2번도 어렵다.. 3번은 괜찮겠지? 4.. 번은? 젠장, 내 생각과 완전히 엇나갔다. 그간 짧게 쓸 수 있는 문제도 여럿 냈는데, 올해는 계속해서 길게 서술해야 하는 문제들이 나왔다. 어버버 하며 2교시가 끝났다.
쉬는 시간은 20분이다. 여자 비율이 90%인 시험이라 화장실은 늘 긴 줄로 서있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나면 쉬는 시간은 10분 남짓, 다들 손에는 책을 들고 다니며 에너지바나 김밥을 먹는다. 나는 복도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았다. 꽉 막힌 교실에서 벗어나 잠깐이나마 뇌를 상쾌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창문 밖을 보고 있으면 시험을 끝까지 보지 않고 밖으로 빠져나오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저것은 포기일까? 용기일까? 왜인지 모르게 부러움을 느끼다 보면 3교시 시작종이 쳤다.
3교시는 교육과정 B이다. 2교시와 같은 형태로 진행이 된다. ‘그래, 2교시가 어려웠으니 3교시는 쉬울 거야.’ 생각하며 시험이 시작되었지만, 아니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게 사실은 실제 시험이 아니라 답안지가 밀려 쓴다거나, 갑작스러운 사고로 시험장에 도착을 못한다거나 등 그동안 수도 없이 꿨던 악몽의 또 다른 버전이지 않을까 싶었다. 꿈속에서 시험을 푸는 것인지, 시험을 풀고 있는데 꿈이라고 바라는 것인지 장자의 마음을 느끼며 시험이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