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며 살아가기를 바라.

by 김소원

몇 년 전, 내가 사는 지역의 시장에 큰 불이 났다. 엄마의 월급날이면 항상 갔던 옷 가게, 길바닥에서 먹던 칼국숫집, 오징어젓갈이 맛있던 반찬 가게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불이 난 지 6년이 넘어가는데 아직 복구는 시작도 되지 않았다. 비용 어쩌고, 이해관계 어쩌게 여전히 논의 중이다. 그 사이 시장의 또 다른 구역에서 불이 났고, 그곳 역시 다 타버린 그 상태 그대로이다. 어느 순간부터 열정의 또 다른 표현으로 불태운다는 말을 쓰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 말을 빌려 시장에 가 불난 곳곳을 바라볼 때면 수험생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열정을 쏟아 온 힘을 다했고, 너덜너덜해진 마음 상태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싸웠다. 나 자신과도, 타인과도, 세상과도. 그렇게 싸우다 보면 마음은 또다시 타버리기 시작했고, 군데군데 있는 화재 흔적을 어떻게 진압해야 할지 모르던 시절. 그때, 내 마음을 진화해 주는 사람을 만났다.


1장에 잠깐 언급된 k는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사람이다. 내 인생은 k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k와의 멘토링 2년 차에는 매번 의견 차이가 생겼다. k가 주장하는 공부 방법들을 알려주면 나는 그대로 수행했는데, k는 계속 아니라고 했다. 나는 분명했다고 말하며 이거 이게 맞지 않느냐고 물으면 k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이거입니다.라고 말하고, 그러면 나는 그제야 이해해 그걸 또다시 하고, 그러면 k는 또 이게 아니라고 말하고의 무한반복이었다. 그렇게 뫼비우스의 띠 같은 대화만 이어지던 중, k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원 선생님, 나에게 속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선생님의 불합격은 감정에 원인이 있는 듯싶어서요.”


그 순간, 뭐에 홀린 듯 부모에 대한 원망, 오빠에 대한 질투, 미웠던 할머니에 대한 나의 깊은 역사를 쏟아냈다. k는 나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다. 뭐가 되었든 너를 낳아준 부모니까 이해하라는 말도, 너보다 힘든 사람들 많으니,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k는 딱 한 마디 했다.


“그동안 버텨내느라 고생 많았어요.”


카우치 상담이라고 있다. 유명 심리학자인 프로이트가 사용한 상담기법인데, “카우치”는 침대를 뜻하며 내담자가 침대에 누워 상담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직접 얼굴을 마주 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속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k를 통해 나는 이 상담 기법의 효과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k와는 늘 화상통화로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화상통화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있긴 하지만, 실제와는 다른 점이 분명히 있기에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언제 철들래?”란 말을 참 많이 듣고 자랐다. 어떤 상황에서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철이 들지 않았음을 매번 확인받았다. 철이 없어야 할 나이에 철을 드느라 모든 삶이 무거워졌다. 10살에는 20살처럼, 20살에는 30살처럼 행동하느라 정작 그 나이 때 할 수 있는, 해야만 했던 행동을 하지 못했다. 나는 늘 철이 없는 아이였기에, 철드는 데에만 집중하느라 무얼 좋아하고, 무얼 잘하는 사람인지를 알지 못했다. 뒤늦게 온 사춘기였다. 힘든 기억들이 많을수록 k에게 의존하는 날들도 많아졌다. 마치 처음 눈을 뜬 오리처럼 k만을 졸졸 쫓아다녔다. k는 나의 질문들에, 내 우울함에 늘 성실히 답해주었다.


k가 전문 상담사는 아니었지만, k와 나에게는 유아교육이 있었다. 어느덧 k와 “우리”가 되어버리고, 우리는 유아교육을 공부하며 자아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아, 정확히는 자아에 대해, 나 자신에 관해 공부하는데 유아교육이 필요했다. 유아교육은 현재의 내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앞으로 삶을 살아가는 방향성을 알려주는 고마운 학문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k에게만 이야기할 수 없었다. k에게는 나 말고 멘토링을 해주는 다른 수험생들도 있었다. 그래서 상담센터에 찾아갔다.


처음 상담을 받기로 결정하였을 때, 꽤 긴 시간 나를 괴롭혔던 모든 슬픔과 불안과 죄책감 같은 감정들이 단번에 해결될 줄 알았다. 적어도 상담사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는 그런 상담사를 보며 눈물을 쏟아내고, 그렇게 살아갈 힘을 얻고 그럴 줄 알았다. 내가 갔던 심리상담센터의 상담자는 50대 여성이었는데, 우리 엄마와 동년배였고, 그의 딸은 나와 또래였다. 그래서인지 상담을 하면서 자꾸 역전이가 되는 것 같았다. 부모에 대한 서운한 감정들, 상처받았던 기억을 말하면 상담사는 자꾸 부모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했다. 마치 자신의 잘못을 해명하듯 말이다. 그럴수록 부모님에게 서운한 감정을 드는 내가 잘못된 것만 같아 죄책감을 느꼈고, 감정들은 더 억압되었다. 3달 후, 상담을 맞췄고, 나의 감정은 더욱 혼란스럽고, 자기혐오의 밤은 더더욱 깊어졌다.


*역전이: 내담자의 전이에 대한 분석가의 무의식적인 반응 (네이버 지식백과. 심리학 용어사전)

*어디까지나 저의 경험일 뿐. 모든 상담센터를 뜻하는 글이 아닙니다.


“아, 결국 나를 살릴 수 있는 건 나밖에 없구나.” 내가 나의 주치의가 되어야 한다. 나에 대한 처방전은 정신과도, 상담소도, k도 아닌 나 자신만이 내릴 수 있다.


내가 나의 주치의가 되고 나서 내린 첫 번째 처방은 강박에서 벗어나기였다. “이래야지 합격해!”라는 포스트잇이 온몸 곳곳에 붙어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포스트잇의 내용은 참 많고도 다양했는데, 공부 시간 10시간 채우기, 드라마나 웹툰 보지 않기, 시험 한 달 전부터는 음악 듣기 금지, 카카오톡 지우기, 주에 2일만 쉬어야 함, 친구들 만나지 않기 등이 있었다. 하나하나씩, 나를 옭아매었던 강박들을 벗어던졌다. 음악도 실컷 듣고, 아플 때는 쉬는 융통성도 발휘했으며 공부 시간을 채우지 않으면 다음 날 1시간 더 공부하는 벌도 주지 않았다.


그때야 인정할 수 있었다. 내가 불합격 한 원인은 노력하지 않아서였음을. “노력”이란 배수의 진을 치고 매 순간 뜨겁게 한 곳만을 바라보며 죽어라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중심에 두고, 목표를 향해 그저 가지는 것이었다. 그동안 난 노력한 것이 아니라 노력의 자극적임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시험을 그만둘 수 있었다. 시험은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닌 부모님의 인정과 사회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온전히 “나”를 바라보고, 내가 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 좋아하는 것 등 “나”를 공부하였다.


오빠가 소방관이 된 후로 함부로 불태웠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화재의 피해를 입은 분들을 비롯하여 화염에 들어가는 소방관분들의 얼굴과 그 가족들의 걱정을 온몸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난 나에게도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 “넌 패배자야.” “넌 안 될 놈이야.”“내 인생은 이제 끝이구나.”등 지난 시간 동안 나를 학대하던 말들을 더는 사용하지 않는다.


난 “내”가 좋다. 사회가 보는 시선은 장수생에, 불안정한 기간제 교사이지만, 내가 보는 “나”는 잘 실패했고, 아이들을 좋아하고, 이를 글로 써낼 수 있는 사람이니까. k가 없었다면, 지금의 난 여전히 시험을 준비하는 우울한 수험생이었을 것이다. k덕분에 한 사람의 믿음이 한 사람의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경험했다. k는 나를 이 세상에 홀로, 단단히 서일 수 있도록, “나”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양육의 최종적 목표는 "독립"이라고 한다. 교사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유치원에서는 7살의 발달 수준까지, 초등학교에서는 13살까지, 중학교는 16살, 고등학교는 19살. 각 학교급에 맞게 교사들이 유아를, 어린이를, 청소년을 교육한다. 올곧은 성인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교육은 믿음이 없이 될 수 없다. 난 내가 만나는 유아들을 믿는다. 단순히 내가 맡게 된 아이들 이서가 아니라, 나의 믿음이 그들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의 믿음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으로까지 전달될 것임을 알기에. 나의 제자들이 어느 순간에도 자신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나를 믿는 것만큼 세상의 큰 무기는 없으니, 자신을 꼭 지키라고 말한다.

이전 16화유치원 교사의 하루는 아이들로만 채워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