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

-숙의의학 소설-

by 강용원


정신장애 진단과 통계 편람DSM-5가 기분mood장애로 분류하지 않았다고 해서 미국 정신의학 협회가 우울장애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전히 본질을 잘 모르고 있다. 우울장애는 “자기부정 증후군”으로서 자기 자신을 우선순위에 두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지도 않음으로써, 늘 타인 기준에서 타인 이익을 위해 파괴적으로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정신장애다. 본령에 터 잡지 않는 피상적 진단으로 우울장애 낙인찍힌 사람들이 각종 약물에 시달리다가 ㅂㅇ를 찾아오는 일이 드물지 않다.


20대 초반 나이에 처음 왔을 때, ㄱㅈ는 자신을 전형적인 중증 우울장애 환자로 굳게 믿었다.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며 이곳저곳 정신과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수없이 들은 병명이었으니 당연하다. 거기다 정신과 치료 과정 어디선가 자기애성 인격장애라는 기분 나쁜 진단 소견을 듣고 격렬하게 반발했던 경험이 더해졌다. 자기애라니, 어디서 순 돌팔이 같은 새끼가.···


ㄱㅈ는 어머니가 어떻게 거듭해서 자신을 버렸는지, 아버지가 어떻게 무심하게 그 일을 방조했는지 세밀하게 묘사했다. 친척과 지인들이 어떻게 아픈 자신에게 무관심했으며, 심지어 악의적으로 자신을 공격했는지 에피소드별로 드라마처럼 설명했다. 자신이 그들에게 얼마나 힘들여 마음을 열고 다가갔는지, 얼마나 희생적으로 그들에게 잘해주었는지 대비시키는 일을 잊지 않았다. 마치 이 부분을 말하지 않으면 결코 우울장애 환자일 수 없기라도 하듯.


ㄱㅈ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달리 특별히 아프며, 다른 사람보다 더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받으려 줄기차게 시도했다. ㄱㅈ는 그 사실을 무조건 끝까지 지지해주는 완벽한 사람을 찾아 헤맸다. ㅂㅇ는 그렇게 생각하는 그 마음 상태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였다. 물론 ㄱㅈ가 그런 질병 실재를 지녔다고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 차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그는 집요하게 ㅂㅇ를 공격했다.


“내가 심각한 우울증인데 선생님은 왜 계속 무시하십니까?”


ㅂㅇ는 나지막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자기 아픔을 깃발로 휘두르는 사람은 우울장애에 빠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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