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말로 말할

-숙의의학 소설-

by 강용원


곱고 귀한 사람 하나 황망하게 잃어버렸다. 지금도 선한 눈매로 환히 웃으며 ㅁㅈ이 방문을 열고 들어설 듯하다. 차마 눈조차 뜨지 못한 채, ‘그 사람 불쌍해서 내가 어떻게 살아요.···’ 만을 되뇌던 배우자가 여태 앞에 앉아 오열하는 듯하다.


몇 년 전 ㅁㅈ은 깊은 우울증으로 ㅂㅇ를 찾아왔다. 수백 리 길을 오가며 몇 차례 숙의치료를 했다. ㅁㅈ은 이 숙의를 통해 새로운 인생 지평선이 열리는 걸 경험했다. 그 뒤 가까운 한의원에서 약도 지어 먹고 하면서, 기운을 되찾아 건강한 삶으로 복귀했다.


ㅁㅈ이 그러는 사이, ㅂㅇ는 인생 최대 시련을 맞아 고전 중에 있었다. 진료소가 결딴나 낭인으로 전국을 떠돌았다. 그러다 천신만고 끝에 ㅁㅁ동 골목에 조그만 마을 진료소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맨주먹으로 빚 얻어 시작한 터라, 초기 함몰비용을 견디지 못해 매 순간 가시방석이었던 나날 끄트머리에 홀연히 ㅁㅈ이 나타났다. 농사꾼인 ㅁㅈ에게는 물론 ㅂㅇ에게도 함부로 못할 거금을 하얀 봉투에 넣어서 말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ㅂㅇ에게 ㅁㅈ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제게 기적이 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물질이 다른 기적을 일으키는 종잣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벼랑 끝에서 ㅂㅇ를 구한 ㅁㅈ은 표표히 자기 삶터로 돌아갔다. ㅂㅇ는 ㅁㅈ 뒷모습을 보며, 건강함에 작은 힘이나마 보탠 인연에 감사했다. 그리고 ㅁㅈ 삶을 믿었다. ㅁㅈ에게 머물던 자기 눈길에 한동안 휴식을 주어도 되겠다며 안심했다. 어느 해 봄 어느 날 그 배우자한테서 급한 문자 한 통이 날아들었다.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합니다. 선생님께서 전화 한번 주세요. 그러면 그 사람 움직일 거예요.”


ㅂㅇ는 지체하지 않고 전화했고, 그 길로 올라오라 해서 만났다. 차를 마시다가 식사로 이어지고, 마침내 낮술로 속을 어루만지며,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ㅁㅈ은 오직 착하고 곧고 맑은 마음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진보 정치 일선을 지키던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진보 진영 파쟁을 온몸으로 겪게 되었다. ㅁㅈ이 받은 상처는 상상 이상이었다. 치명적이었다. 그 상처를, 그 억울함을 어디에도 다 털어놓고 말하지 못한 채, 말한 그대로 이해받지 못한 채, 속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ㅁㅈ은 울며불며, 가슴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 어둠이 짙푸르게 내려앉을 때까지. ㅂㅇ는 깊이 경청했고 ㅁㅈ의 주장을, 깊은 마음을 수용했다. 그리고 헤어지면서 ㅁㅈ이 고통스러운 그 강을 또다시 잘 건너가리라 믿었다. 전처럼 신뢰를 보내주었다.


이 신뢰는 한낱 안일함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도 아픈 사람에게서 삶의 냄새만 맡고 죽음의 냄새는 짐짓 외면하는 통속한 의자 감수성, 아니 관성이 그날 만남을 마지막 만남이 되게 하고 말았다. 저 통속한 신뢰 알량한 봉인을 뜯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다 마침내, 다시 한번 급박한 문자 한 통으로 ㅂㅇ의 영혼은 된서리를 맞았다.

“선생님, 그 사람이 세상을 버렸습니다.”


ㅂㅇ는 후회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을 함께 새 줄걸, 내려간 뒤 수시로 챙길걸, 그가 왔듯 내가 갈걸.··· 허접한 후회가 어찌 그리 쓰린지. ㅁㅈ 오열이 떠오를 때마다 온몸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도록 부끄러웠다. ㅁㅈ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떨치지 못하여, 찰나마다 숨이 멎곤 했다. 그러다 문득, 한 깨달음 앞에 무릎 꿇었다.


‘통속한 의자 죄책감이 이러할진대, 연애 5년 동안 사랑 편지 이천 통을 주고받았던, 부부로 살면서 그 고통 고비마다 동참했던,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멀쩡했으나 더 이상 온기를 내지 않는 그 뺨을 부비며 울부짖었던, 그 배우자 심경은 오죽할까. 오히려 의자 죄책감은 권력 표현 따위가 아닐까.··· 그래, 이 순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 앞에 아픈 사람 하나하나 제대로 살피는 게 참된 애도다. 매일매일 하늘 연인에게 연애편지를 쓰며 온 영혼으로 견디고 있는 그 배우자에게 한약 한 제 정성껏 달여 보내는 게 의자 애도다.’


ㅂㅇ는 삼가 있는 그대로 ㅁㅈ 삶에 도저한 공감과 지지를 보냈다. ㅁㅈ 죽음에 대해 지니고 있는 마음을 이제는 더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자칫 그 죽음을 욕되게 할까 두렵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막걸리에 감자전 놓고 말할 수 없는 말로 그 죽음을 말할 때가 오리라 믿었다. 그때 누군가 다시 들어주리라 믿었다.


오늘 아침도, 떠났지만 늘 여기 있는 사람 ㅁㅈ 연인이 쓴 연애편지를 읽으며, 촉촉이 젖은 가슴으로 ㅂㅇ는 하루 진료를 시작한다. 부디 저 아름다운 사랑과 삶이 누리에 번져가기를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