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숙의의학 서설-

by 강용원


ㄹㅂ가 내 진료소로 전화를 한 것은 가을이 설악산 봉우리 끝을 물들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간호사가 전화를 바꾸며 놀란 눈초리로 말했다.


“막 울어요!”


황급히 전화를 건네받으니 눈물에 흠뻑 젖은 목소리가 질척질척 밀려들었다. 몇 마디 주고받은 뒤 나는 대뜸 올라오라 했다. 그의 집은 천 리 밖 바닷가 도시였다.


ㄹㅂ는 매우 영특했다. 지적으로 조숙했다. 중학생 시절부터 진보적 시사 잡지를 읽었다. 고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최고 명문대 최고 명문 학과에 입학했다. 사달이 났다. ‘성공직후증후군’의 함정에 빠져버린 거다. 이룰 것을 이루고 나서 드는 허탈감. 끝인 줄 알았더니 또 다른 시작. 왕으로 살았는데 왕 위에 득실거리는 귀신들. 지방 도시에서 급작스럽게 서울로 환경이 바뀌면서 들이닥친 소외감. 속수무책으로 고립된다. 가차 없이 무력해진다. 십수 년 뒤, 그가 나를 찾아왔을 때는 이미 학업 포기, 정신병원 입원 병력, 외국 유랑을 거치며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자살 충동, 수치심, 죄책감, 예기 불안, 감정 역전, 무의미감, 강박적 반추, 사고 지평의 무한 확장···엉망진창 뒤죽박죽 그 자체였다.


그 와중에도 ㄹㅂ는 마르크시즘, 생태학, 진화심리학, 인류학, 신과학을 위시한 다양한 독서를 통해 무너진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확립하는 일에 동분서주·좌충우돌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경향성과 기질에 맞추어 대화를 시작했다. 방대한 독서, 뛰어난 지적 흡수력, 세계관의 체계화를 향한 왕성한 욕구를 감안하며 때로는 자분자분 때로는 열렬히 이야기를 풀어 나아갔다.


무엇보다 먼저 나는 ㄹㅂ의 자기언급self reference을 지원했다. 자기언급은 애도의 주요 방법으로서 둘이자 하나인 목적을 지닌다. 접힌(억눌린) 슬픔과 아픔을 펴기(풀어내기) 위함이 그 하나다. 과장된(격정 상태인) 슬픔과 아픔을 보통의 정서로 되돌리기 위함이 그 다른 하나다. 이 둘은 슬픔과 아픔을 삶의 일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 삶을 바꾸려는 목적 하나로 수렴된다. 삶을 바꾸려 말하고 또 말한다.


나는 말하고 또 말했다. 내 말은 에베레스트 꼭대기서 비티아즈 바닥으로, 시베리아 변방에서 태평양 한복판으로 거침없이 돌아다녔다. 인류 파멸을 걱정하는 예언자인가 하면, 어느새 멍에 씌운 삶을 부질없어하는 허무주의자가 되어 있곤 했다. ㅂㅇ는 내 말 전체에 주의를 기울이고 부분에 집중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치면서 들었다. 내가 그렇게 하는 데는 다 그만한 곡절이 있다는 사실을 헤아렸음이 틀림없다. 그렇게 몇 달이 흘러갔다.


적절한 때라고 생각했는지 어느 날 ㅂㅇ는 뚜벅 내게 제안했다.


“고민의 주제를 일렬횡대로 세우지 말고 일렬종대로 세워보면 어떨까요?”


이는 내 말을 휴먼스케일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 함이었다. 일렬횡대로 세우면 대소·경중·완급의 구분이 힘들다. 일렬종대로 세우면 우선순위를 매기기 쉽다. 맨 뒤부터 이야기 대상에서 뺀다. 사실 그동안 내게 이 작업이 거의 불가능했다.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돌아서 제법 말이 단출해지자 ㅂㅇ는 그다음 제안을 했다.


“주제와 주제 사이의 관련성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이는 바로 앞 목적에 이야기가 체계를 갖추게 하려는 목적을 더한 셈이다. 관련성이 없거나 적은 주제를 차례로 이야기 대상에서 뺀다. 사실 그동안 내 얘기는 병렬적 벌여 놓기였다. 내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휴먼스케일 안으로 들어와 체계를 잡기 시작했다. ㅂㅇ는 그다음 제안을 했다.


“생각한 바를 자기 경험과 연결되는 한에서 이야기해보면 어떨까요?”


이는 휴먼스케일 안으로 들어와 체계를 잡은 이야기가 구체적 생활 에피소드와 연결되도록 하려는 취지였다. 사실 경험과 유리된 생각을 무한히 전개하는 일이야말로 내 허무감과 무력감이 흘러나오는 진원 아니었던가. 허무와 무력에 무슨 인격이 맺히겠는가. 내가 입자 인격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하자 ㅂㅇ는 좀 더 구체적인 제안을 했다.


“자기 경험에서 우러나온 생각부터 이야기해보면 어떨까요?”


이는 내 이야기 방향을 일대 전환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내게서 비롯하여 세계로 스며드는 삶을 선언하려 함이었다. ‘남풍을 맞으려면 북창을 열어라.’였다. 이후 숙의는 늘 한 주간 무슨 일이 있었는가, ㅂㅇ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끄트머리에서야 비로소 요즘 무슨 생각 하세요, 무슨 책 읽으세요, 그가 묻는다. 내 말 방향이 바뀌자 ㅂㅇ 제안은 한 발 더 감각적인 차원으로 다가갔다.


“몸 움직임에서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울기, 웃기, 숨쉬기, 걷기, 청소, 설거지, 맨손체조···마음은 몸 마음이다. 마음 문제를 살피는 가장 날카로운 지점은 몸이다. 마음 문제를 풀어내는 가장 옹골찬 지점은 몸이다. 사실 그동안 나는 성행위를 제외하고 몸 움직임에 주의하고 거기서 마음 문제를 일으키지 못했다. 자각하지 못한 채 오랜 세월 싸가지 없는 이원론자로 처 살아온 게 맞다. 내 성찰이 뼈아픈 지경에 이르자, ㅂㅇ는 마지막으로 제안하고 선언했다.


“마침내 손 감각입니다.”


ㅂㅇ는 내게 다양한 손 감각 현장을 소개했다. 손 글씨를 쓰도록 했다. 섬세한 손동작으로 간단한 물건을 만들게 했다. 강아지를 보살필 때, 쌀을 씻을 때, 흙을 만질 때, 씨앗을 심을 때·······그 손 감각이 어떤지 느껴보도록 했다. 나는 나날이 달라졌다. 손끝으로 전해오는 감동을 느끼기 시작했다. 유가 다른 눈물을 자주 흘렸다. 감정의 고저·완급·청탁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제약 없이 날뛰던 생각들에 네트워크가 생겼다. 휴먼스케일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전’ 지구에서 ‘내’ 손끝으로 삶이 오자 나의 내면에서는 일대 혁명이 일어난다. 비대칭 대칭이라는 세계진실의 논리가 사유와 실천 종자로 자리한다. 일극집중구조 허상을 여실히 깨닫는다. 말로는 대승이라 하면서 실제로 소승에 사로잡힌 사이비 견성 실체를 간파한다. 천착주의가 지적·영적 포르노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수직 영성은 은유일 뿐 수평 영성만이 진실임을 확인한다. 수평, 그러니까 드넓은 영성은 자기 무한 확장 아닌 소미심심小微沁心, 그러니까 아주 작은 존재로서 아주 작은 존재에 배어듦으로만 이룰 수 있다는 진리를 수용한다.


ㄹㅂ는 이런 변화 전체 과정에서 결코 수동적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누구라도 그러하듯 저 사람 믿을 만한가, 이렇게 해서 나아는 지나, 대체 언제까지 하라는 거야·······회의하고 미적거리고 겨우 좇아가는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흔들림 구간을 통과하며 그는 능동적으로 자기 아픔과 삶을 숙의하는 데에 익숙해져 갔다. 그의 참여 덕분에 나 또한 자세를 고쳐 잡고 독서 하는가 하면 진지하게 사유도 했다. 내가 말했다.


“지금 우리는 더불어 혁명하고 있습니다.”


이 혁명 과정에 경이로운 회심 사건이 터져 일어난다. 박근혜·최순실 패거리 사병 노릇을 하던 경찰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 선생이 돌아가신 것. ㄹㅂ는 몇 날 며칠 눈물을 쏟으며 빈소를 지켰다. 백남기 선생 죽음과 격렬하게 조우한 것은 그가 새로운 삶을 결단한 사건과 맞물린다. 깊은 우울 늪에서 빠져나와 그가 마침내 선택한 새 삶이 다름 아닌 자연농이었으니 말이다. 그에게 백남기 선생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 그는 희생당한 그 하느님을 품고, 자기 부활한 삶 첫걸음을 내딛게 된 일에 감격하며 하염없이 울었다. 그 눈물은 슬픔과 기쁨, 회한과 감사, 이별과 상봉이 절묘하게 마주쳐 빚어낸 진신사리 같은 무엇이었다.


회심 이후 ㄹㅂ는 우여곡절을 견뎌내며 그야말로 “유물론적” 농부 삶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나는 그가 겪는 혁명적 생애 스승이자 도반이다. 의자로서 내 삶은 그렇게 그에게 스며든다. 그가 나를 끌어안고 울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아. 내가 이 한 사람을 만나려고 그렇게 험한 세월 돌고 돌아 의자가 되었나 보다.’ 한다. 그에게만큼은 내가 익명의 존재가 아니니 생색 한번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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