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의의학 소설-
어머니는 핏덩이인 나를 두고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할머니와 고모 손에 크면서 모질게 학대받았다. 학령기·청소년기 학교생활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공장에 들어갔다. 거기서 나는 우연히 사회정치 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 체계적인 지식 습득 없이 울분과 열정으로 뛰어든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판에서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상처받았다. 나중에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고초를 당하기까지 했다.
이런 삶의 고비마다 술이 있었다. 술은 단순한 알코올이 아니었다. 술은 내 ‘어머니’였다. 술은 광기를 길어 올리는 악마의 우물이었다. 그 술에 빠져 상상 불허 온갖 불상사를 일으켰다. 번번이 유치장 신세를 졌다. 새로운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결심하고 나는 ㅂㅇ 에게 숙의치료를 청했다.
나는 ㅎㅅ가 대화하는데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대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문맥이 사라지는가 하면 이로에 누수 현상이 수시로 일어났다. 무엇보다 타인 말에 집중하는 힘이 현저히 떨어져 자꾸 자기 세계 속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말 밑바닥을 흐르는 진지함과 선함조차 사회적 맥락을 떠나있기 일쑤였다.
나는 그 삶 전경을 염두에 두고 감정과 상처 동선을 이어갔다. 그가 순간에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간단하게 정리해주었다. 그가 단박에 실천할 수 있도록 명료하게 조언해주었다. 나름대로 유의미한 숙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아무런 말도 없이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치료비 지급을 뒤로 미루고, 책을 빌려 간 상태였다. 얼마간 기다리다가 나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어찌 지내십니까? 상담을 왜 오시지 않는지 묻지 않겠습니다. 그럴 만한 곡절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지급하지 않으신 상담치료비를 청구하지도 않겠습니다. 그럴 만한 곡절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부디 책만은 돌려주셨으면 합니다. 저자 친필 서명이 들어 있는 소중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로운 나날이길 빕니다.”
며칠 뒤, 책만 묵묵히 돌아왔다.
[후일담] 5년이 지난 어느 날, 홀연히 그가 나타나 상담치료비를 지급했다. 추락 사고로 몸을 많이 다쳤다면서 침 치료받더니 다시 홀연히 발길을 끊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묵묵히 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