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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Mar 08. 2024

나나보조 이야기 177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1 


              

숙의는 반제국주의 전선 소통 본진이다   

  

이제까지 이야기한 반제국주의 의학 서사는 당위적 선언이며 실천적 지침이며 임상적 경험이다. 이제부터 말하고자 하는 팡이실이 숙의 서사 주축은 마음 아픈 사람을 숙의로 치유한 실제를 소설적 방식으로 재구성한 이야기다. 녹색의학 가운데 정신의학적 측면을 돋을새김한 서사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50대 초반에 늦깎이 의자가 되기 20여 년 전부터 이미 상담, 아니 숙의에 깊이 잠긴 삶을 살아왔으므로 의학 그 너머 사상과 실천을 담았다.  

    

내 숙의 본성은 원효 사상에서 발원한다. 원효 사상은 그냥 불교 사상이 아니고 우리 유구한 생명공동체 바탕 의식인 바리 사상을 불교로 해석한 판본이다. “화쟁(和諍)”이라는 말로 압축되는 그 사상은 오늘 여기 우리 화제로 표현하면 “반제국주의 팡이실이”다. (이 문제를 다룬 자세한 서사는 『안녕, 우울증』(알라딘 서재 <싸리·버들 글숲> 마이리뷰(2015.12.24.~2016.5.10.)에 실은 자기 주해)과 『인문과 한의학 치료로 만나다』, 특히 후자에 실려 있다.)   

    

바리 사상은 가부장 일극 집중을 해체하고 다극 연방 세계를 재창조하는 숙의 사건, 그러니까 팡이실이다. 나는 팡이실이에 터 잡아 마음 아픈 사람을 치유해 왔다. 이 일은 당연히 반제국주의 전선을 이루는 한 축일 뿐만이 아니라 그에 앞선 밑절미기도 하다. 여기 이야기는 이루지 못한 이야기 셋, 이룬 이야기 넷을 열한 번에 걸쳐 되풀이하는 방식으로 짜놓은 증언 일흔일곱이다. 이 증언은 숙의야말로 반제국주의 전선 소통 본진이라는 선언이다.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에 앞서 몇 가지 이야기로 숙의 서사 이해를 돕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의학적이든 그 너머든 제국주의가 억누르고 비틀어 삿된 방식으로 나타난 어두운 풍경을 드러낸다. 여기서는 음성적 찌꺼기 소통을 포함해 일방적 담론과 약물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런 뒤, 숙의가 어떤 경로를 통해 우리 삶에 옹글게 들어오게 되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이야기한다. 아직도 우리는 숙의에 낯을 심하게 가리는 편이기 때문이다.



숙덕대면 안 된다    

 

바야흐로 숙덕질 독재(susurrus tyrannicus) 시대다. 20세기 쾌거인 민주주의가 21세기 들어 급격히 퇴락하면서, 제국 자본은 인간의 언어를 대거 숙덕질로 끌어내렸다. 숙덕질은 남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낮은 목소리로 하는 수군대기다. 넓게 보면, 말 못/안 하고 홀로 꽁꽁대는 ‘꽁’질, 사리에 맞지 않는 ‘개소리’질, 맞기는 하지만 빈정상하는 ‘꼰대’질 들이 모두 숙덕질에 해당한다. 숙덕질은 큰 소리로 당당하게 말할 수 없게 하는 상처, 왜곡, 분리, 억압의 현실을 반영한다. 

     

숙덕질 독재는 현대 인류 사회, 문명이 포르노 그 자체라는 사실과 비대칭의 대칭을 이룬다. 전체성에서 떼어낸 파편을 선동적으로 증강해, 관음(觀淫)과 중독으로 몰고 가는 모든 제국주의 행태와 체제를 우리는 포르노라고 일컫는다. 포르노로 변질되지 않은 사회 분야는 없다. 심지어 종교, 법, 의료조차 포르노로 영락했다. 포르노가 점령한 세상에서는, 포르노 자체만 남기고 모든 담론이 숙덕질이 된다. 포르노는 말문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 또는 해소하기 위한 소통 방편을 말이라 할 때, 숙덕질은 두 가지 병리를 머금는다.

      

첫째, 문제를 정색하고 직면하지 않는 병리다. 숙덕대는 사람은 혼자서 하거나, 뒤에서 또는 돌아서서 그리한다. 대놓고 하는 듯 보이는 수도 있지만, 문제 본질에 단도직입으로 다가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외면이긴 마찬가지다. 문제를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감응(response)함으로써 행복한 삶을 여는, 통합의 주체 노릇을 하지 못하(게 하)는 병적 상황이다.  

     

둘째, 소통이 되지 못하게 하는 병리다. 당당하게 정확하게 말해야 소통이 되고, 소통되어야 해결/해소가 가능한데, 낮게 작게 심지어 말이 아니게 웅얼거리거나 아예 침묵하(게 하)는 병적 상황이다.   

  

숙덕질은, 첫머리에 말했듯,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일당 마음 병을 치유하는 문제에만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가슴에 담아 놓고 생각 되풀이하기(rumination), 흐느껴 울기, 주위 사람에게 하소연하기, 사이비 영성 프로모션(긍정주의 자기 계발), 의학을 무시한 이른바 인문 치유, 약물로 증상만 억제하는 서구정신의학이 그들이다.    

  

   가슴에 담아 놓고 생각 되풀이하기    

 

많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정신장애를 ‘미친 것’으로 취급하거나, 고약한 ‘성질머리’, 나약한 정신력, 인격적 결함, 따위로 곡해한다. 특히 아이나 여성일 경우는 이런 시선 앞에서 좀 더 불리하다. 이들은 자기 고통을 말할 수 없다. 가슴에 담아 놓고, 수시로 달려드는 병적 생각에 반복적으로 잠겨 들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말하지 못하는 다른 곡절이 하나 더 있다. 고통이 깊어지면, 아픈 사람들은 자기 말을 누구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더욱 굳게 한다. 두 가지를 이유로 꼽는다. 자기만 유독 그런 고통을 겪는다는 생각이 그 하나다. 다른 하나는 타인보다 자기가 현저하게 더 고통당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대화하지 않으면, 이 생각은 늪이 되어간다. 심지어 대화해도, 자기 고통을 특화하는 쪽으로 생각이 미끄러진다.  

    

이들은 꽁꽁거린다. 내면으로 꽁꽁 숨어버린다. 스스로 숙덕댈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살아 있으나, 죽은 상태로 굳어져 간다. 생각 속에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흐느껴 울기  

   

마음 병으로 숙의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사람이 운다. 우는 사람 대부분은 흐느끼며 운다. 흐느껴 우는 일은, 말을 은폐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억압인 숙덕질이다. 울어야 치유되는데, 흐느껴 우는 것은 치유 효과가 없다.     

 

어떤 상담자가 말했다. ‘서럽게 흐느껴 우는 사람 앞에 화장지 한 장을 건네면, 곧바로 울지 말라는 신호로 작동하기 때문에, 나는 울음을 멈출 때까지 기다린다.’라고. 섬세한 배려다. 맞다. 틀렸다. 흐느낌이 길어질수록 언어는 차단되고, 숙덕질이 길어진다. 나는 마냥 기다리지 않는다. 예리하게 틈을 내어, 고요하고 기민하게 화장지 상자를 통째로 건넨다. 무슨 뜻인가? 맘껏 통곡하라는 신호다. 그래도 소리가 덜 나오면 단도직입 길을 터준다.    

  

“엉엉 우세요!”     


방성대곡은 은폐된 말을 우꾼우꾼 열어젖힐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해방인 첫 숙의 발성이다. 흐느껴 우는 일을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주위 사람에게 하소연하기 

    

우울장애로 상담을 시작한 어떤 분이 멘토에 의지해 온 지난 이야기를 했다. 멘토가 누구냐고 물으니 직장 선배라고 했다. 방송 매체가 연예인들한테 써먹으면서부터 급격히 멘토란 말은 싸구려가 되었다. 하소연 들어주는 사람이면 개나 소나 멘토가 되는 세상이다.   

   

살다가 어려운 일 만날 때, 친지나 선배 만나 속에 있는 이야기 하면서 손잡고 울면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비아냥거릴 필요는 없다. 경청하고 공감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우울증 걸릴 일 없다는 말을 일소에 부칠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우울장애라는 명백한 질병을 앓는 사람이 주위 사람에게 하소연하는 것으로 치료가 된다면, 우울장애로 자살하는 사람은 대체 뭐란 말인가. 우울장애, 가벼운 거 아니다. 매우 육중한 질병이다. 주위 사람이 무능해서가 아니고 하소연이 너절해서가 아니라, 우울장애가 준엄한 질병이라서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말이다.     

 

주위 사람에게 하소연하는 것은 숙덕질일 따름이다. 하소연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질병의 실체에 다가가는 길로 들어서기보다는 길섶에서 서성거릴 가능성이 높다. 삼갈 일이다.    

  

   사이비 영성 프로모션(긍정주의 자기 계발)   

  

종교도 포르노가 되어버렸다고, 이미 말했다. 포르노로서 종교가 신도를 낚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영성 프로모션이다. 수련, 기도, 상담의 이름으로 마케팅하는 가운데, 마음 치유가 빠질 리 없다. 

     

종교단체를 흉내 내거나, 종교 아닌 외양을 지니지만 알맹이는 신흥종교인 단학·기공·요가 수련 단체, 아예 긍정주의 자기 계발을 전면에 내세운 영성 프로모션 전문 업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일어나, 마음 치유를 공약으로 걸고 성업 중이다.   

   

저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 저들이 할 수 없는 일도 분명히 있다. 저들은 그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신앙이나 수련으로 정화하고 고양해야 할 마음결과 의학으로 치료해야 할 마음결은,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이상으로 결코 같다고 할 수 없다.     

 

의학이 허깨비가 아닌 한, 의학적 접근을 배제한 이런 치유는 사이비일 뿐이다. 그들의 탄탄한 프로그램과 매혹적인 언어들은 모두 숙덕질일 따름이다. 일단 매료되면, 빠져나오기 대단히 어렵다.  

   

   이른바 인문 치유  

   

인문 치유는 이미 익숙한 개념이다. 상담을 표방한 스타 철학자가 지상파 방송까지 진출하는 등, 나름 블루오션이다. 철학은 치료적 본질을 지녀야 한다고 갈파한 칸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문학이 인간 정신에 미치는 치유 효과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도 종교나 수련단체와 마찬가지의 사이비가 존재한다. 인문학의 언어가 가닿을 수 없는 마음의 질병까지 고친다고 떠드는 허황한 자신감이 가소로울 따름이다.  

   

인문학이 치유를 말하는 것은, 사실 내부 성찰에서 기원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외부에서 들어온 마케팅의 일환이었다. 웰빙에 이어 힐링이란 말이 사회 전반을 휩쓸자, 온갖 것에 힐링만 붙이면 돈이 되는 풍조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돈 안 된다는 이유로 위기를 맞고 있던 인문학에 좋은 출구 하나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하고많은 학문 중에 하필 인문학에만 치유력이 없을 리도 없으나, 인문학에만 치유력이 있을 리도 없다. 병들고 부조리한 사회가 지어낸 일과성 에피소드가 아닐까, 걱정스럽다. 

     

인문 치유가 지금처럼 소비되는 한, 그것은 전형적인 숙덕질에 지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뜨르르한 한 명망가처럼 야단쳐서 치유한다고 호언한다면, 아픈 사람에게 다시없는 악소문일 터이다. ‘꼰대’질로 우울장애가 고쳐진다면, 나도 당장 꼰대가 되겠다. 인문학이라고 해서 그 숙덕질이 기품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약물로 증상만 억제하는 서구정신의학 

    

마음 병 치유에서 최고의 숙덕질, 최악의 스캔들은 단연 서구정신의학이다. 서구정신의학은 숙의하지 않는다. 서구정신의학에서 마음 병은 그냥 뇌 질환일 뿐이다. 다른 몸 병을 대하는 태도와 똑같다. 화학합성물질을 투여함으로써 증상만 억제하는 짓이 서구정신의학 치료 전부다. 심지어 그 약 중에는 마약 유사 효과를 내는 것도 있다. 인간 마음을 뇌 작용이라고 우기는 서구정신의학 숙덕질에 인간 마음을 더는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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