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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Mar 09. 2024

나나보조 이야기 178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2  


        

숙의 의학(medicina deliberatio)이란 무엇인가 

    

숙덕질 독재에서 벗어나 마음 병 진경으로 들어가려면, 의당 마음이 지닌 시간적 맥락과 공간적 지평을 극진히 살펴야 한다. 살피는 방편은 말이다. 말을 주고받음, 그러니까 소통으로써 마음에 결결이 닿아야 아픔과 슬픔, 그 곡절을 알 수 있다.   

   

소통이란 말 만큼이나 소중하면서도 소모품이 돼버린 말이 다시 있을까. 그럼에도 소통은 더없이 소중하니 포기할 수 없다. 그 포기 못 할 소통을 위한 가장 정중하고 민주적인 방편이 바로 숙의(熟議)다. 숙의란 충분히 생각하여 깊고 넓게 의논하는 일이다. 크건 작건 문제가 생기면, 관련된 당사자들이 평등하게 의견을 내고 자유롭게 논의하여 해결 또는 해소해 가는 과정을 통틀어 숙의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날이 갈수록 더욱 심각해져만 가는 마음 병을 치유하는 데, 숙의는 필수 불가결하다. 나는 마음 병을 치유하는 의자(醫者)가 되기 훨씬 전부터 다양한 인연의 결을 따라 상담자의 삶을 살아왔다. 40년 넘게 그 경험이 쌓이는 동안, 상담에서 숙담으로, 숙담에서 숙의로 변화되는 과정을 겪었다.   


   상담평범한 일방행위


이는 평범하고 통속한 바로 그 상담이다. 누구나 접하고, 누구나 할 법한 그런 상담이다. 이 단계에서 상담자는 스스로 주도적으로 누군가를 변화시키고 치유한다는 의식을 지닌다. 아무리 내담자가 많은 말을 하더라도 치유 주도권은 상담자가 쥐고 있다. 진실 여부와 무관함은 물론이다. 여기서 나누는 이야기는 정신의학이나 임상심리학의 내용이 압도적 우위를 점한다.


   숙담평범한 쌍방행위


이는 평범하지만 통속하지 않은 상담이다. 이 단계에서 상담자는 내담자를 더 이상 객체로 다루지 않는다. 동등한 서로 주체로 대한다. 내담자도 치유 주체임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이야기 속으로 정신의학이나 임상심리학 넘어 내용이 들어온다. 이를테면 인문 상담 성격이 함께 존재한다. 함께 마음 병과 그 조건인 일상을 가로지르며 폭넓은 치유연대를 형성한다. 



   숙의비범한 쌍방행위


이는 비범한 상담이다. 아니 상담을 넘어선 무엇이다. 치유 그 너머 땅에 발을 내디디는 숭고한 작업이다. 정신의학, 임상심리학, 그리고 인문학, 그 너머 사회과학 영역이 융해된다. 상담 두 당사자가 함께 삶을 깊고 넓게 의논한다. 더불어 새로운 삶을 빚어가는 창조연대를 형성한다. 그 창조는 기품 있는 산육(産育) 행위다. 인간은 끊임없는 상호 산육으로 공공선을 이룬다. 이 숙의가 바로 팡이실이다. 제국주의 반대말이다. 

    


숙의가 어디 쉬운 일인가  

   

사람들이 묻는다. 허구한 날 아픈 사람하고 사는데 아프지 않은가? 아프다, 심하게. 어떻게 사는가? 아픈 사람과 새로운 삶을 충분히 생각하여 깊고 넓게 의논하며 산다. 숙의에 경이가 깃든다. 경이가 함께 아픈 우리를 나날이 살아가게 한다. 

     

삶은 상호작용이다. 서로 극진히 주고받아 늘 즐겁고 거룩하게 어울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더 많은 경우는 아무리 극진히 주고받아도 어긋나고 만다. 안타까워한다. 후회한다. 뉘우친다. 되돌리려 한다. 끝내 부질없는 일이 된다. 이런 여정을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삶으로 살아지는 여정이 인생 아닌가. 숙의 서사를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환자가 마음을 열고 다가와 말하고 내가 들었지만, 상호작용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은 경우다. 여기에는 내가 경청했지만, 환자에게는 부족하게 여겨졌거나, 내가 확실히 부족해서 상호작용이 잘 일어나지 않은 경우가 포함된다. 무엇보다, 둘 다 곡진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상호작용이 잘 일어나지 않은 경우가 포함된다. 

  

둘째, 아픈 분이 마음 문을 잘 열지 못하거나 가족을 포함한 주위 사람이 가로막아서, 내가 극진히 정성을 기울여 말길을 열려 했지만, 상호작용이 잘 일어나지 않은 경우다.    

  

셋째, 상호작용이 잘 되어 새로운 삶을 여는 기틀을 마련하거나 성취한 경우, 그리고 극히 짧은 만남이었지만 신뢰할 만한 실마리를 열어 놓은 경우다.   


        

이거 내 이야기 아닌가  

   

다양한 사연과 마주칠 때, 이거 내 얘기다, 할 만한 대목이 반드시 나온다. 특히 나와 마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테다. 내용이 다르다, 왜곡됐다, 창피하다, 상처받았다···반응을 보일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가장 신경 쓴 데가 바로 여기다.  

    

기본적인 틀을 제외하면 세부 사항은 최대한 일반성을 띠도록 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성별 구분을 없앴다. 그 밖에도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를 최대한 제거했다. 이야기 성격이 같으면, 다른 사람 것과 묶기도 했다. 거꾸로 한 사람 이야기를 나누어 쓴 예도 있다. 이야기 논점은 세우되 그 논점을 둘러싼 사람들에게는 상처를 주지 않으려 했다.  

    

모든 서사는 해석이다. 누구나 이 해석에 참여할 수 있다. 내 얘기다, 확신이 들 때, 방향과 내용에 자기 목소리를 내면 된다. 부디 여기 이야기들이 함께 엮는 증언으로 되어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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