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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Mar 11. 2024

나나보조 이야기 179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3



부끄러움에 상한은 없다   

  

나는 늦깎이로, 공자가 지천명(知天命)이라 일컬은 나이에 한의사가 되었다. 물론 그 말대로 천명을 안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의학 공부 이전에 법학과 신학을 공부하긴 했지만, 천명을 아는 것이 어디 그런 공부 따위로 되는 일이던가? 의자가 천명인가, 의자로서 자각하는 천명이란 무엇일까, 한의대 다니는 6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 물음은 늘 미뤄진 상태에 있었다. 하기야 의자의 스승은 환자인데, 실제 임상이 없는 상태에서 그런 고뇌를 한다고 해본들 뭐 대수로운 결과가 나왔겠나.   

   

그 와중에 내가 우울증을 오랫동안 앓아왔다는 사실은 근본적인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아팠던 사람이 아픈 사람을 고치는 법이니까. 게다가 경험 있는 손아래 한의사 한 사람이 개원 무렵 찾아와 ‘형님이라면 정신과 쪽으로 경쟁력 있습니다.’ 하지 뭔가. 용기도 내고 깜냥대로 열심히 준비도 했다. 얼마 뒤, 우울증 상담 치료를 내걸고 첫발을 내디뎠다.  

    

문제는 내 의료적 방향이 아니었다; 내 의학적 자세였다. 탁월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는 알량한 자신감에 가득 차서 환자를 내 틀에 맞추려 했다. 당연히 환자들은 거부했다. 격렬히 반발하기도 했다. 생각을 바꾸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해석·판단을 내려놓고 듣기 시작했다. 

    

전에는 말하기 위해 들었다. 바꾼 뒤에는 하염없이 환자의 말을 들었다. 무슨 말을 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환자 말은 스스로 길을 찾아갔다. 내 말을 미리 준비하지도 않았다. 할 말은 저절로 생겨났다.  

    

마음 병 치유는 상호작용 중의 상호작용이다. 의자가 일방적 행위로 지시하고 투약하는 짓은 질병 자체를 모독하고 왜곡하는 짓이다. 구태여 순서를 둬야 한다면 환자에게 서사 발화(發話) 우선권을 부여해야 한다. 의자는 경청 의무를 진다. 현실은 사뭇 다르다. 환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문을 두드리는데 의자가 듣지 않거나,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은 환자도 간절하고 의자도 곡진한데 어긋나는 경우다. 현실에서는 뜻밖에(!) 이 경우가 가장 많다. 통상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고 말기 때문에 어느 한쪽 잘못으로 분류된다. 둘 다 잘못이 없어도 인연이 비껴가는 진실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사건 실재를 깨닫는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둘 다 잘못이 없어도 어긋나는 경우가 환자와 의자 사이 일이라면, 치유 공부를 한 의자가 그것을 자기 부끄러움으로 품어 안아야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20년 가까이 직업적으로 상담하는 삶을 살았다. 일일이 다 기억할 수 없는 사연이 훨씬 더 많음은 물론이다. 절절히 말하고 곡진히 들었으나, 인연 지음이 극히 짧아 딸랑 진료부 한 장으로 남은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 이치를 따지고 보면, 이 또한 의자인 내 모자람의 문제다. 가능한 대로 살려보려 애썼지만, 여기 실린 이야기보다 더 기구한 사연들이 기억 저편에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미리 말해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앞으로 전개될 내용은 2023년 4월 28일부터 2023년 5월 18일까지 브런치스토리에 “숙의의학 소설”이라는 부제로 올려놓은 글이다. 그대로 또 올리면 이미 읽은 사람에게는 재독을 강요하는 꼴이 된다. 그렇다고 읽지 않은 사람은 거기 찾아가 읽으라는 식으로 넘어가면 불편함을 강요하는 꼴이 된다. 고민 끝에 대안을 마련했다: 내용을 고쳐 다시 올린다. 물론 거의 손댈 수 없는 이야기도 있고, 개작이나 다름없이 크게 손대야 할 이야기도 있다. 두 번 읽는 사람을 위해 의미와 풍미를 한껏 새로이 할 일이다.  

          

들어가기에 앞서나지막한 마그나 카르타    

 

존재 둘이 부딪치면 소리 하나를 낸다. 사람 둘이 숙의하면 새 삶 하나를 창조한다. 숙의가 창조하는 새 삶은 상호작용이 깔아놓는 연속된 휜 공간에서 찰나마다 불연속적 변화 사건을 빚어낸다. 숙의 치유 변화는 물론 아픈 사람한테서 일어난다. 그것이 목적이다. 목적을 넘어서는 축복이 있다. 치료자의 변화. 치료자 또한 유한한 도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치료자 또한 아프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숙의 치유는 아프고 슬픈 사람이 빚어가는 나지막한 연대다. 공생 운동 종잣돈이다. 제국주의 자본이 신자유주의 바이러스로 생명 공동체를 박멸하고 있는 21세기에 가장 유력한 처방은 숙의의학, 그러니까 정신 생물학적 패자가 일으키는 소미심심(小微沁心: 작디작게 작디작은 것에 배어드는 마음) 팡이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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