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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Mar 13. 2024

나나보조 이야기 180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4  


        

들어가며- 0(zero) 이야기 

    

0, 정확한 나이를 나는 여태도 모른다. 그런 채 서로 알고 지낸 지 70년이 다 돼가는 벗이다. 그런 그가 정색하고 자기 이야길 하겠다며 찾아오기는 이번이 실로 처음이다. 단골인 동네 밥집에 마주 앉았다. 술잔을 기울이며 시간에 등 돌리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밥집은 뒷정리마저 거의 끝나간다. 괜찮다는 주인의 고갯짓에 기대어 한 시간쯤 더 보냈다. 가장 행복한 술자리는 뒷부분 기억이 슬쩍 자리를 뜨는 것인데, 딱 그렇게 되었다. 물론 그렇게 자리 뜬 기억 속에 더 많은 곡절이 배어들기도 하겠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가 이런저런 이야기 가운데 불쑥 이런 말을 했다.    

  

“부끄러운 일인데, 70년이 다 돼서야 비로소 내 인생에 종자(種子) 신뢰가 생겼네.”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의 지난 삶이 어떠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행위로는 그 종자 신뢰라는 말이 지닌 진실에 가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흠, 종자 신뢰라.     


“근원적이고 급진적인 믿음이라는 말 같군. 진실의 문은 양쪽에 있다는 깨침에서 왔을 테지. 비대칭 대칭에 통짜로 스며들었다는 게송 같네.”   

  

누군들 이름 없이 덧없이 살다 죽기를 바라겠는가. 각자 자기 스타로 떠서 한 생을 놀다 가는데 기왕이면 ‘대박’ 나기를 꿈꾸지 않는 이 그 누군가. 하지만 0은 인욕(忍辱), 아니 진욕(進辱) 언어를 흘려낸다.   

  

“대박은 아득하고. 쪽박에서 딱 반걸음 떨어져 아슬아슬 살아왔더니 그제야 믿어지더라고.”    

 

그 삶은 여태까지 일곱 번 꺾였다. 어머니 자궁에서 1번째 꺾였다. 어머니가 명백한 살해 의지를 지니고 낙태를 여러 번 꾀했다. 0살에 2번째 꺾였다. 어머니에게서 젖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10살에 3번째 꺾였다. 팥쥐 엄마와 마주쳐 깊은 내상을 입었다. 24살에 4번째 꺾였다. 평범한 인생 욕망을 포기했다. 38살에 5번째 꺾였다. 비범한 인간 이상을 포기했다. 52살에 6번째 꺾였다. 사회경제적으로 타살당했다. 68살에 7번째 꺾였다. 제국에 부역한 무지렁이임이 폭로됐다.   

   

그는 아마도 겹 허리를 지닌 듯하다. 꺾인 허리를 그때마다 일으켜 세우고 길섶으로 기어 나왔으니 말이다. 가장자리이긴 해도 오늘 그는 기어이 길 위를 걷고 있다. 그 가장자리 길에는 아픈 사람이 있다. 아픈 사람이 있으므로 아픈 이야기가 있다. 지나가는 인연이라도 아픈 사람이, 만들어진 서사라도 아픈 이야기가 0 실재다. 0 실재 방식은 그러니까 숙의다.   

   

그 숙의에 내가 참여하는 길은 묵묵히 듣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가 어찌 보면 실패로 점철된 한 생을 살아가는 동안, 결곡한 걸음으로 용득(用得)한 종자 신뢰에 무슨 입을 댄들 뭘 보탤 수 있겠나 싶어서 말이다. 그와 나는 늦은 밤 밥집을 나설 때, 평담하게 두 손 잡았다. 술에 취해선가 허정허정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가만가만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보았다. 0.   


        

말할 수 없는 말로    

  

곱고 귀한 사람 하나 황망하게 잃어버렸다. 지금도 선한 눈매로 환히 웃으며 1-1이 방문을 열고 들어설 듯하다. 차마 눈조차 뜨지 못한 채, ‘그 사람 불쌍해서 내가 어떻게 살아요.···’ 만을 되뇌던 배우자가 여태 앞에 앉아 오열하는 듯하다.    

 

몇 년 전 1-1은 깊은 우울증으로 0을 찾아왔다. 수백 리 길을 오가며 숙의 치유를 했다. 1-1은 이 숙의를 통해 새로운 인생 지평이 열리는 걸 경험했다. 그 뒤 가까운 한의원에서 약도 지어 먹고 하면서, 기운을 되찾아 건강한 삶으로 복귀했다.     


그가 그러는 사이, 0은 인생 최대 시련을 맞아 고전 중에 있었다. 진료소가 결딴나 낭인으로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러다 천신만고 끝에 변두리 동네 안 골목에 조그만 진료소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맨주먹으로 빚 얻어 시작한 터라, 초기 함몰비용을 견디지 못해 매 순간 가시방석이었던 나날 끄트머리에 홀연히 1-1이 나타났다. 농자인 1-1에게는 물론 0에게도 함부로 하지 못할 거금을 하얀 봉투에 넣어서 말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0에게 1-1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제게 기적이 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물질이 다른 기적을 일으키는 종잣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벼랑 끝에서 0을 구한 1-1은 표표히 자기 삶터로 돌아갔다. 0은 1-1 뒷모습을 보며, 건강함에 작은 힘이나마 보탠 인연에 고마워했다. 그리고 그 삶을 믿었다. 그에게 머물던 자기 눈길에 한동안 휴식을 주어도 되겠다며 안심했다. 어느 해 어느 봄날 그 배우자한테서 급한 문자 한 통이 날아들었다.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합니다. 선생님께서 전화 한번 주세요. 그러면 그 사람 움직일 거예요.”   

   

0은 지체하지 않고 전화해, 그 길로 만났다. 차를 마시다가 식사로 이어지고, 마침내 낮술로 속을 어루만지며,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1-1은 오직 착하고 곧고 맑은 마음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진보 정치판 일선을 지키던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진보 진영 파열을 온몸으로 겪게 되었다. 1-1이 받은 상처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치명적이었다. 그 상처를, 그 억울함을 어디에도 다 털어놓고 말하지 못한 채, 말한 그대로 이해받지 못한 채, 속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1-1은 울며불며, 가슴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 어둠이 짙푸르게 내려앉을 때까지. 0은 깊이 경청했고 1-1의 주장을, 깊은 마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헤어지면서 1-1이 고통스러운 그 강을 또다시 잘 건너가리라 믿었다. 전처럼 신뢰를 보내주었다.   

  

이 신뢰는 한낱 안일함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도 아픈 사람에게서 삶 냄새만 맡고 죽음 냄새는 짐짓 외면하는 통속한 의자 감수성, 아니 관성이 그날 만남을 마지막 만남이 되게 하고 말았다. 저 통속한 신뢰 알량한 봉인을 뜯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다 마침내, 다시 한번 급박한 문자 한 통으로 0은 영혼에 벼락을 맞았다.     

 

“선생님, 그 사람이 세상을 버렸습니다.”  

    

0은 후회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을 함께 새 줄걸, 내려간 뒤 수시로 챙길걸, 그가 왔듯 내가 갈걸··· 허접한 후회가 어찌 그리 쓰린지. 오열하는 1-1을 떠올릴 때마다 온몸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도록 부끄러웠다. 그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떨치지 못하여, 찰나마다 숨이 멎곤 했다. 그러다 문득, 한 깨달음 앞에 무릎 꿇었다. 

    

“통속한 의자 죄책감이 이러할진대, 연애하는 동안 사랑 편지 수천 통을 주고받았던, 부부로 살면서 그 고통 고비마다 동참했던,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멀쩡했으나 더 이상 온기를 내지 않는 그 뺨을 비비며 울부짖었던, 그 배우자 심경은 오죽할까. 오히려 의자 죄책감은 권력 표현 따위가 아닐까.··· 그래, 이 순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 앞에 아픈 사람 하나하나 제대로 살피는 게 참된 애도다. 매일매일 하늘 연인에게 연애편지를 쓰며 온 영혼으로 견디고 있는 그 배우자에게 한약 한 제 정성껏 달여 보내는 일이 내 애도다.”  

    

0은 삼가 있는 그대로 1-1 삶에 웅숭깊은 공감과 지지를 보냈다. 그 죽음에 대해 지니는 마음을 이제는 더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자칫 그 죽음을 욕되게 할까 두렵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막걸리에 감자전 놓고 말할 수 없는 말로 그 죽음을 말할 때가 오리라 믿었다. 그때 누군가 다시 들어주리라 믿었다.  

    

오늘 아침도, 떠났지만 늘 여기 있는 사람 1-1 연인이 쓴 연애편지를 읽으며, 촉촉이 젖은 가슴으로 0은 하루 진료를 시작한다. 부디 저 아름다운 사랑과 삶이 누리에 번져가기를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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