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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Mar 15. 2024

나나보조 이야기 182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6 


         

혁명    

 

1-4가 내 진료소로 전화를 한 때는 가을이 설악산 봉우리 끝을 물들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간호사가 전화를 바꾸며 놀란 눈초리로 말했다.   

   

“막 울어요!”     


황급히 전화를 건네받으니, 눈물에 흠뻑 젖은 목소리가 질척질척 밀려들었다. 몇 마디 주고받은 뒤 나는 대뜸 오라고 했다. 그의 집은 천 리 밖 바닷가 도시였다.   

   

1-4는 매우 영특했다. 지적으로 조숙했다. 중학생 시절부터 진보적 시사 잡지를 읽었다. 고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최고 명문대 최고 명문 학과에 입학했다. 사달이 났다. ‘성공직후증후군’의 함정에 빠져버렸다. 이룰 바를 이루고 나서 드는 허탈감. 끝인 줄 알았더니 또 다른 시작. 왕으로 살았는데 왕 위에 득실거리는 귀신들. 지방 도시에서 급작스럽게 서울로 환경이 바뀌면서 들이닥친 소외감. 속수무책으로 고립된다. 가차 없이 무력해진다. 십수 년 뒤, 그가 나를 찾아왔을 때는 이미 학업 포기, 정신병원 입원 병력, 외국 유랑을 거치며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자살 충동, 수치심, 죄책감, 예기 불안, 감정 역전, 무의미감, 강박적 반추, 사고 지평의 무한 확장···엉망진창 뒤죽박죽 그 자체였다. 

     

그 와중에도 1-4는 마르크시즘, 생태학, 진화심리학, 인류학, 신과학을 위시한 다양한 독서를 통해 무너진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확립하는 일에 동분서주·좌충우돌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경향성과 기질에 맞추어 대화를 시작했다. 방대한 독서, 뛰어난 지적 흡수력, 세계관의 체계화를 향한 왕성한 욕구를 고려하며 때로는 자분자분 때로는 열렬히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무엇보다 먼저 나는 1-4의 자기 언급(self reference)을 지원했다. 자기 언급은 주요한 애도 방편으로서 둘이자 하나인 목적을 지닌다. 접힌(억눌린) 슬픔과 아픔을 펴기(풀어내기) 위함이 그 하나다. 과장된(격정 상태인) 슬픔과 아픔을 보통의 정서로 되돌리기 위함이 그 다른 하나다. 이 둘은 슬픔과 아픔을 삶의 일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 삶을 바꾸려는 목적 하나로 수렴된다. 삶을 바꾸려 말하고, 또 말한다.   


        

나는 말하고, 또 말했다. 내 말은 초모랑마 꼭대기서 챌린저 바닥으로, 시베리아 변방에서 태평양 한복판으로 거침없이 돌아다녔다. 인류 파멸을 걱정하는 예언자인가 하면, 어느새 멍에 씌운 삶을 부질없어하는 허무주의자가 되어 있곤 했다. 0은 내 말 전체에 주의를 기울이고 부분에 집중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치면서 들었다. 내가 그렇게 하는 데는 다 그만한 곡절이 있다는 사실을 헤아렸음이 틀림없다. 그렇게 몇 달이 흘러갔다. 

     

적절한 때라고 생각했는지 어느 날 0은 뚜벅 내게 제안했다.    

  

“고민 주제를 일렬횡대로 세우지 말고 일렬종대로 세워보면 어떨까요?”       


이는 내 말을 휴먼스케일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 함이었다. 일렬횡대로 세우면 대소·경중·완급 구분이 힘들다. 일렬종대로 세우면 우선순위를 매기기 쉽다. 맨 뒤부터 이야기 대상에서 뺀다. 사실 그동안 내게 이 작업이 거의 불가능했다.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돌아서 제법 말이 단출해지자 0은 그다음 제안을 했다.


“주제와 주제 사이 관련성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이는 바로 앞 목적에 이야기가 체계를 갖추게 하려는 목적을 더한 셈이다. 관련성이 없거나 적은 주제를 차례로 이야기 대상에서 뺀다. 사실 그동안 내 얘기는 병렬적 벌여 놓기였다. 내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휴먼스케일 안으로 들어와 체계를 잡기 시작했다. 0은 그다음 제안을 했다.     


“생각한 바를 자기 경험과 연결되는 한에서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요?”     


이는 휴먼스케일 안으로 들어와 체계를 잡은 이야기가 구체적 생활 에피소드와 연결되도록 하려는 취지였다. 사실 경험과 유리된 생각을 무한히 전개하는 일이야말로 내 허무감과 무력감이 흘러나오는 진원 아니었던가. 허무와 무력에 무슨 인격이 맺히겠는가. 내가 입자 인격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하자 0은 좀 더 구체적인 제안을 했다.     

 

“자기 경험에서 우러나온 생각부터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요?” 

    

이는 내 이야기 방향을 일대 전환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내게서 비롯하여 세계로 스며드는 삶을 선언하려 함이었다. ‘남풍을 맞으려면 북창을 열어라.’였다. 이후 숙의는 늘 한 주간 무슨 일이 있었는가, 0이 던지는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끄트머리에서야 비로소 요즘 무슨 생각 하세요, 무슨 책 읽으세요, 묻는다. 내 말 방향이 바뀌니까 제안은 한 발 더 감각적인 차원으로 다가갔다. 

    

“몸 움직임에서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울기, 웃기, 숨쉬기, 걷기, 청소, 설거지, 맨손체조···마음은 몸 마음이다. 마음 문제를 살피는 가장 날카로운 지점은 몸이다. 마음 문제를 풀어내는 가장 옹골찬 지점은 몸이다. 사실 그동안 나는 성행위를 제외하고 몸 움직임에 주의하고 거기서 마음 문제를 일으키지 못했다. 자각하지 못한 채 오랜 세월 ‘싸가지’ 없는 이원론자로 처 살아온 게 맞다. 내 성찰이 뼈아픈 지점에 이르자, 0은 마지막으로 제안하고 선언했다.  

    

“마침내 손 감각입니다.” 

    

0은 내게 다양한 손 감각 현장을 소개했다. 손 글씨를 쓰도록 했다. 섬세한 손동작으로 간단한 물건을 만들게 했다. 강아지를 보살필 때, 쌀을 씻을 때, 흙을 만질 때, 씨앗을 심을 때···그 손 감각이 어떤지 느껴보도록 했다. 나는 나날이 달라졌다. 손끝으로 전해오는 감동을 이제 느껴 갔다. 유가 다른 눈물을 자주 흘렸다. 감정이 짓는 고저·완급·청탁을 조절했다. 제약 없이 날뛰던 생각들에 팡이실이가 생겼다. 휴먼스케일 감지가 가능해졌다.    

 

‘전’ 지구에서 ‘내’ 손끝으로 삶이 오자 내면은 일대 혁명을 일으킨다. 비대칭 대칭이라는 세계 진실 논리가 사유와 실천 종자로 자리 잡는다. 일극 집중구조 허상을 여실히 깨닫는다. 말로는 대승이라 하면서 실제로 소승에 사로잡힌 사이비 견성(見性) 실체를 간파한다. 천착에 매달리는 짓이 지적·영적 포르노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수직 영성은 은유일 뿐 수평 영성만이 진실임을 확인한다. 수평, 그러니까 드넓은 영성은 자기 무한 확장 아닌 소미심심(小微沁心), 그러니까 아주 작은 존재로서 아주 작은 존재에 배어듦으로만 이룰 수 있다는 진리를 받아들인다.  


        

1-4는 이런 변화 전체 과정에서 결코 수동적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누구라도 그러하듯 저 사람 믿을 만한가, 이렇게 해서 나아는 지나, 대체 언제까지 하라는 거야·······회의하고 미적거리고 겨우 좇아가는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흔들림 구간을 통과하며 그는 능동적으로 자기 아픔과 삶을 숙의하는 데에 익숙해졌다. 그 참여 덕분에 나 또한 자세를 고쳐 잡고 독서하는가 하면 진지하게 사유도 했다. 내가 말했다.  

    

“지금 우리는 더불어 혁명하는 중입니다.”  

   

그렇다. 나는 그가 겪는 혁명적 생애 스승이자 도반이다. 의자로서 내 삶은 그렇게 그에게 배어든다. 그가 나를 끌어안고 울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아. 내가 이 한 사람을 만나려고 그렇게 험한 세월 돌고 돌아 의자가 되었나 보다.’ 한다. 그에게만큼은 내가 익명 존재가 아니니 생색 한번 크게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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