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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Apr 02. 2024

나나보조 이야기 197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21  


             

데스마스크     


죽은 사람이 걸어 들어오는 줄만 알았다. 4-4의 얼굴은 영락없이 데스마스크였다. 흐려진 눈동자 하며, 회색 낯빛 하며, 있을 리 없는 표정 하며, 게다가 턱관절 장애 때문에 뒤틀린 얼굴은, 데스마스크보다 도리어 섬쩍지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두 살배기 아기를 둔 20대 중반이 그릴 수 있는 어떤 풍경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 모습만으로 그가 할 천 마디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 사연은 간단명료합니다. 경제적으로 능력이 부족한 상태였기에 배우자 아버지가 조그만 집을 사주었습니다. 자신이 사준 집이어서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 아버지는 따로 열쇠 하나를 복사해서 지니고 다녔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문을 따고 드나들었음은 물론입니다. 20대 신혼부부에게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 아버지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입맞춤 한번 편안하게 할 수 없는 처지를 만들어 놓고, 천하태평이었습니다. 사방이 유리로 된 집에 벌거벗겨진 채, 구경거리로 갇혀 있는 느낌입니다.”   


       

0은 내게 두 가지를 확인했다. 집을 돌려줄 수 있는가? 가능하지 않다. 이혼할 수 있는가? 가당하지 않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그가 경쾌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싸워야죠!”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게 ‘배우자 아버지와 싸우기 총론’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5분이 채 안 된 짧은 시간에 기적이 일어났다. 이런 기적은 나와 같은 부류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목격할 수 없는, 소미하지만 위대한 광경이다. 4-4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다. 낯빛이 연분홍으로 되었다. 표정이 해맑아졌다. 턱관절이 바로잡혀 인중 선이 수직으로 곧아졌다. 나는 짐짓, 나지막이 그에게 말했다.   

  

“거울 좀 보실래요?” 

    

정작 기적은 따로 있었다.   

  

“선생님, 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랬다. 나는 이미 내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이토록 섬세한 생명 감각 때문에 그 질곡은 죽음에 육박하는 무엇으로 느껴졌으리라. 나는 한껏 행복한 마음으로 0이 우당탕 두드려 대는 ‘배우자 아버지와 싸우기 각론’을 흡입했다.  


         

경제적 여유가 그다지 없었기 때문에, 나와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4-4의 작업은 미구에 막을 내렸다. 그가 경험한 기적만큼 싸움이 경이롭지는 않았을 터. 두렵고 어렵고 외롭고 눈물겨웠음이 틀림없다. 그래도 그 얼굴 떠올리면, 유능한 싸움꾼으로 자라 씩씩하게 살고 있는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아브라카다브라!  



        

경계   

  

사람이 인연을 맺고 가꾸는 일에 표준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없이 아름답게 만나 정성을 기울여도 손가락 사이 모래 빠지듯 사라지는 인연이 있는가 하면,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무심코 지나치다가도 나중에 인생 인연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 제게 왔을 때, 4-5가 시종 짓고 있었던 표정만으로 생각한다면 뭔가 처음부터 어긋난 만남이 틀림없었습니다. 첫날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로도 네 번은 먼 산 보고, 졸고, 동문서답하고, 몸 꼬고···도대체 자신이 여기 왜 오는지 모르겠다는 자세로 일관했습니다. 


          

여섯 번째 날, 나는 벼락 맞은 듯 돌연 방향을 바꾸었다. 나는 그때까지 0 선생이 내준 글쓰기 같은 과제들을 마지못해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내 선입견 넘어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이끌림이랄까. 나는 능동적·적극적으로 숙의에 임하기 시작했다. 

     

0 선생에 따르면 내가 겪는 고통은 자신과 타인의 경계 설정이 잘되지 않는 데서 왔다. 실제로 영유아기 전후 엄마와 맺는 애착 관계 형성에 작지 않은 단절이 있었다. 닿음에서 느끼는 일치감·친밀감, 떨어짐에서 느끼는 단절감·소외감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지 못하여 감정 기복이 심했다. 너무 가까워서 무경계인 듯 느껴지는 상황도, 멀찌막이 떨어져 소통 없이 냉대당하는 상황도 못 견뎌 했다. 전자는 형이, 후자는 아버지가 대상이었다. 어머니가 중재적 위치에 있기는 했지만, 스스로 약하다고 느꼈다. 내가 방어기제로 작동시킨 것은 자해였다.     

 

0 선생은 내게 글쓰기를 제안했다. 데면데면 글을 쓰다가 어느 구비에서 홀연히 들이닥치는 자각이 있었다. 격분의 언어를 넘어, 자해를 넘어, 분노가 몸을 통해 조절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격분이 일으키는 폭력적 언어 대신 분노를 표현하는 일상어가 가능해졌다. 자해 행위도 멈추었다. 형과도 아버지와도 화해했다. 


          

12번째 숙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전 협의 없이 저와 4-5는 숙의 종결 의견에서 일치를 보았습니다. 이런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몇 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당한 의사가 되어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자신감 쩌는 모습이 재수 없었지만 내 업보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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