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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Apr 16. 2024

나나보조 이야기 209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32   


       

후회는 후     


북아메리카 원주민 영혼이 깃들었을 법한 인상을 풍겨내는 7-1이 들어섰다. 손대지 않아 다소 중성적인 이미지가 나오지만, 균형 잡힌 이목구비 선이 기본적으로 수려한 얼굴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입에서 우울증이라는 말이 흘러나오기까지 0은 그가 온 이유를 잠시 잊고 있었다. 

    

“저는 가방끈이 길지 못한 사람입니다. 제 능력 문제가 아니었음은 물론입니다. 그 사람은 명문대학을 나왔습니다. 저희 결합이 한참 기울어진 일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주위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으레 가방끈 길지 못한 제 탓이라 간주하곤 했습니다. 그 사람 부모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기본 예의조차 서슴없이 뭉개는 게 다반사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통 큰 희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명문대 출신이라는 자랑과 사뭇 어울리지 않는 쌍스러운 폭언을 퍼부을 때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생업을 규모 있게 꾸리는 데에 미숙했습니다. 저희의 충돌은 매우 잦았습니다. 물리적 폭력이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대화는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마침내 저는 우울증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가방끈 길이와 무관하게 7-1의 생각은 바르고 맑았다. 0은 배우자 면면이 궁금했다. 세 사람이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거의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배우자는 소신이 뚜렷하며 진지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유연하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보수적인 주류 가치관이 자기 배우자에게 가하는 차별을 별로 문제 삼지 않았다. 0은 대화 끄트머리에 그들에게 말했다.   

  

“부부 기품은 그리 대단한 무엇이 아닙니다. 어느 한쪽이 박탈감을 느끼지 않으면 그 부부는 기품 있는 부부입니다. 누구 말이 옳은가, 따지는 싸움에서 결론이 나지 않으면 형평을 고려하는 선에서 마무리하십시오.”   

  

그들 현실 상황에서 형평을 맞추려면, 배우자가 그에게 많은 배려와 양보를 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0은 그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스스로 평가해 보았다. 두 가지 점에서 부족함이 있었다.   

   

“첫째, 형평이라는 원만한 결과보다 거래라는 치열한 과정을 좀 더 역동적으로 언급했어야 한다. 그가 기울어진 시소 위에 앉아 있는 까닭은 사랑도 결혼생활도 거래라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바르고 맑은 생각이 거래에 많은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거래 현실 감각, 전략·전술을 개요만이라도 제대로 전달했어야 일방적 편들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둘째, 거래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니까, 시선을 부부 사이에 가두지 말아야 문제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었어야 한다. 거래는 부모 자식 사이에서도 남남 사이에도, 그러니까 나와 그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니까 말이다. 삶 전반에서 일어나는 거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므로 부부 문제만 그렇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아이와, 또 나와 거래하면서 어찌해야 형평을 이루는지 일러주었어야 그가 전체적 관점으로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    

 

그 뒤 이런저런 사정으로 숙의는 장기간 중단되었다. 어느 날 그 배우자가 세상을 등졌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후회와 자책으로 뒤척이는 나날이 흘러갔다. 이제라도, 남은 그하고라도 거래를 숙의해야 한다고 0은 생각했다. 배우자 없는 삶에서도 거래는 어김없이 계속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장단 

   

아이를 불안으로 몰아넣는 방법은 간단하다. 부모의 양육 태도가 서로 다르기만 하면 된다. 아이는 누구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해진다. 더 간단한 방법이 있다. 엄마가 이랬다저랬다 하면 된다. 아이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해진다. 이 둘이 동맹하면 백전백승이다.  

    

10대 중반인 7-2가 어느 날 끌려오듯 0에게 왔다. 처음 몇 주 동안은 찌푸린 얼굴을 한사코 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도끼눈을 뜨고 한숨을 쉬며 다리를 떨었다. 시종 툭툭거렸다.  

    

7-2는 학교 공부는 고사하고 아예 출석조차 하지 않아 퇴학 위기에 몰려 있었다. 사춘기 아이가 흔히 하는 반항 행위 전형을 하나도 빠짐없이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하는 짓이 아니었다. 홀로 먹고 홀로 돌아다녔다. 수시로 집을 나갔다. 가족 누구에게라도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자수성가형 부자다. 매우 이성적이며 공격적이었다. 대화보다는 지시에 능했다. 오만하지 않으나 자부심이 강했다. 어머니도 결혼 전에는 대중적 지명도가 높은 전문직업인이었다. 매우 감성적이며 포용적이었다. 직관과 순발력이 뛰어났으며 즉흥적이었다. 

     

7-2는 아버지에게는 강력한 단절 감정을 지녔다. 어머니에게는 맹목적 연속 감정을 지녔다. 후자는 복잡·미묘하다. 연속성에 신뢰가 빠진 탓으로 상황마다 그는 대처를 달리해야 했다. 그의 불안은 점차 발작적 공황으로 터지는 확률을 높여갔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는 0을 매개로 부모를 조종하려 끊임없이 시도했다. 0을 매개로 그를 조종하려는 부모, 특히 어머니와 수 싸움을 벌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도 어머니도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병적 불안인지 깨달을 수 없었다. 불가피한 불가능이었다. 그 상황에서 0이 할 수 있는 일 또한 그러하였다. 그는 폐쇄병동에 들어갔다.   


        

최연소 노인 

    

맥박은 가늘고 약했다. 게다가 심한 부정맥이었다.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다고 호소했다. 간단한 음식물을 사 들고 와 치료 시작 직전에 내게 건넸다. 엄마 손에 이끌려 온 10대 초반 7-3 이야기다. 그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7-3의 부모는 나이 차가 많았다. 아버지는 재혼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남매를 두고 있었다. 초혼인 어머니는 그 하나를 낳았다. 다섯 가족은 그리 평화롭지 못했다. 그를 제외한 네 사람 모두에게는, 규모는 달랐지만 각자 견고한 성이 있었다. 그 성주들이 벌이는 크고 작은 전투 때문에 왕국 공기는 늘 냉랭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공격적이고 즉흥적이었다. 아버지는 권모술수, 어머니는 단순 돌격 스타일이라는 점이 달랐다. 형은 냉담했다. 누나는 비교적 마음을 여는 편이지만 열쇠 쥔 위치를 적극 활용하지 않았다. 이중적 태도가 공통점이었다.  

        

이런 특성들이 다양한 대립각을 그려내면서 기상천외한 전투를 벌였다. 그럴 때마다 자기 성을 지니지 못 한 7-3은 성들 사이에서 동분서주했다. 누구 어떤 장단에 춤을 추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알지 못 한 채 떨었다. 

   

7-3이 현실적으로 택할 방법은 많지 않았다. 모두에게 우호적 태도를 견지하는 일만이 최선이었다. 어차피 왕국에 일관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때그때 적응하면 그만이었다. 뭔가 질문하면 다 괜찮다고 대답했다. 용돈을 모아 누구에겐가 무엇을 대접할 비자금을 조성했다. 그렇게 10년 남짓 살아오는 동안 몸도 마음도 모두 쇠약한 노인이 되어버렸다. 

     

나는 아버지에게 7-3을 살리려면 음모를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에게 그를 살리려면 돌격을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형에게 그를 살리려면 조금만이라도 따뜻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누나에게 그를 살리려면 조금만이라도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게 가해지는 총체적 수탈을 어떻게든 막아야 했으니 말이다. 

   

파국은 의외로 이르게 찾아왔다. 치료 중 이 왕국 전쟁에서 자기 책임 소재를 명토 박는 순간이 오자 7-3의 어머니는 가차 없이 발길을 끊었다. 이내 모두 발길을 끊었다. 흔들리는 눈망울로 음료수병을 내밀던 그 작은 손에는 지금 무엇이 들려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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