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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Apr 17. 2024

나나보조 이야기 210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33  


        

  

   

중구난방인 사춘기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여리고 고운 마음씨, 그 마음씨를 똑 닮은 목소리를 지닌 교사 7-4가 나를 찾아왔다. 온 마음과 몸을 금방 눈물에 데쳐낸 듯 짙푸른 슬픔 향이 흠뻑 밴 모습이었다.   

   

어머니와 애착 형성이 남달랐던 그는 어머니 죽음에 즈음해서 자신이 본디 슬픔에 취약한 사람임을 알아차렸다. 어머니 죽음은 그에게 마치 생애 초기 이별과 같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많았다. 어머니는 그에게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매우 가슴 아파했으며,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내내 하셨다. 


          

그랬다. 내게는 아이가 없었다. 그 사실이 검푸른 해연을 이루고 있었다. 온갖 방법을 다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무책임한 의료인한테 입은 상처 또한 커서, 단순히 우울증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복잡한 병리 상태 속에 휘감겨 있었다.   

   

0은 치유자로서 펼칠 수 있는 최대한의 생명 감각으로 내 아픈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며 빛이며 냄새에 가 닿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나 또한 곡진한 감각으로 내 서사를 가꾸어 갔다. 첫날 숙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는 아름다운 경험에 깃들게 되었다.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른 뒤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그 순간 누가 뒤에서 포근히 저를 감싸 안는 거예요. 하도 편해 놀라지도 않고 가만히 느껴보니 선생님이셨습니다.” 

    

아, 숙의가 이런 풍경도 그려내는구나! 놀란 장본인은 오히려 나였다. 그 뒤 7-4와 나는 슬픈 사람이 왜 다 퍼주며 사는지, 거절도 주장도 못 하는지, 슬픔을 펼쳐 드러내지 못하는지···이야기를 나누었다. 삶 절반은 전투라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는 조금씩 여태 살아온 그 맞은편 진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7-4는 자신에게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차마 밝히지 못했다. 일대 회심의 날이 날아들었다. 그는 드디어 가슴을 열어 고백했다. 순간, 교실은 신비한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 후, 선생님을 대하는 제자들 마음이 달라졌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상처 입은 한 아이가 다가와 엄마에게서 버려진 자기 아픔을 고백하는 감응 사건이 터져 그를 감동으로 몰아넣었다. 아마 그 두 사람, 결코 잃을(!) 수 없는 인연으로 묶였지 싶다.    


       

그렇다. 0과 내가 그렇게 가슴을 여는 일은 작은 시작일 뿐이다. 열고 또 여는 일은 계속 번져가리라. 내가 죽고, 그가 죽고, 또···죽어도. 죽  



           

지지 

    

다시 그와 같은 숙의 상대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7-5는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으로 큰 종교단체 소속인 중견 지도자였다. 혹 있을 수 있는 실덕을 막으려 신분을 감추고 나를 찾아왔다. 얼핏 보면 당차게 느껴지지만, 그 눈에는 불안이 강고한 구조로 자리하고 있었다. 


          

내 불안 내력은 길고 깊다. 어린 시절, 오지 않는 어머니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길을 잃고 홀로 거리를 헤맨 적도 많았다. 사춘기 시절 맞닥뜨린 우발적 성 경험이 일으킨 수치심과 죄책감은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녔다. 시간이 흐르면서 잊히고 완화되는 일이 일어나기는커녕, 사회생활을 통한 접촉 기회가 많아질수록 대인공포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온갖 치료가 무용했다. 나는 결국 종교에 귀의했다. 마지막 희망도 그다지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어찌 치료를 포기할 수 있겠는가.  

    

0은 내 종교에 예를 갖추면서 폭넓은 숙의를 이어 나아갔다. 종교 경전이나 큰 스승 가르침이 동원되었고 그에 상응하는 의학적 담론이 오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무릎을 쳤다. 그의 입을 나와 내 귀에 날아든 ‘정서적 지지’라는 평범한 말 한마디가 가슴속 은산철벽에 쩡 하고 금을 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게 익숙한 어휘와 담론은 대부분 ‘이성적 이해’였으니 말이다. 

     

정서적 지지를 내부 속으로 들여놓는 일이 기적처럼 일어나지는 않는다. 수십 년 동안 반대하고 내쫓으려고만 했던 어둠의 정서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는 일이 어찌 쉽겠나. 단박에 깨뜨린다는 마법적 희망까지 내려놓아야 비로소 동 터오듯 치료 길이 열리기 마련이다. 나는 이 이치를 따르고자 하는 종자 신뢰를 기다림 속에서 얻으리라. 

  

        

삼베 바지에서 방귀 빠지듯 7-5의 발길이 사라졌다. 나는 그런 그 선택을 존중했다. 제법 세월이 흐르는 동안 드물지 않게 그 간절했던 눈길이 떠오르곤 했다. 아직도 그가 그 종교에 헌신하고 있는가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 만약 그가 지금 자유 영혼이 되어 있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그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정서를 지지하면서 고요히 살아가지 않을까 짐작해 보기만 한다. _()_ 나무관세음보혜사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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