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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Apr 18. 2024

나나보조 이야기 211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34 


         

5년 안에

     

7-6은 수려한 용모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빼어난 전문지식을 지닌 강남 출신 엘리트다. 그렇다고 통속한 '똥 부자' 부모 덕분에 스펙 쌓고 특목고 간 다음, 관악산 자락에서 몇 년 놀다, 대기업 들어간 경우는 전혀 아니다. 평범하게 일반고 나와, 자기 힘으로 소신껏 원하는 대학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나름 어렵디어렵다는 금융계 노릇노릇한 자리에 냉큼 자리 잡은 영특한 청년이다. 한데 그런 그가 대체 무슨 이유로 날 찾아왔을까? 그런 그에게 어떤 고통과 어둠이 있을까?  

   

그가 수려한 용모를 지녔다고 말했다. 거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할 이야기가 있다. ‘중성적’ 이미지가 그에게서 풍긴다는 사실이다. 여러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만 내게는 그 이미지가 애정결핍으로 읽힌다. 결핍을 어렵사리 극복한 데서 나타나는 어정뜬 균형, 그러니까 그리움이 여전히 기갈처럼 남아 있는 절제가 자아내는 풍경이 중성이기 때문이다. 그 결핍은, 지닌 자를 먹잇감으로, 다루는 자를 포식자로 배치한다. 그렇다. 그는 먹잇감이었다.  


         

내 아버지는 투명 인간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롤 모델도 아니고 기댈 수도 없고 부족함을 채워주지도 않는 아버지와 나는 늘 먼 평행선을 유지했다. 생애 결정적 길목을 돌 때마다 나는 늘 혼자였다. 부성애는 내게 우묵한 결핍이었다.   

  

어머니는 거의 내 자신이었다. 아니, 내가 거의 어머니 자신이라 표현해야 정확하다. 어머니는 자기 원통한 삶에 나를 포개놓고 살았다. 나는 언제나 어머니 해원굿이어야 했다. 과도한 책임감은 늘 죄책감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죄책감은 늘 자기 파괴적 희생으로 구현되었다. 모성애는 나에게 봉긋한 결핍이었다.  

    

중첩된 결핍은 내 인간관계를 근원적으로 지배했다. 무엇보다 내 연애를 쥐고 흔들었다. 내 연인은 늘 자식같이 굴었다. 내 그리움인 부성애나 모성애가 그에게는 없었다. 물론 연인에게도 곡절이 있을 터이다. 우리는 늘 그런 문제 때문에 심하게 다투었다. 사과와 화해는 늘 내 몫이었다. 이런 불균형에서 나는 날카로운 박탈감을 느꼈다. 연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연인은 늘 즐겁게 자신에게 집중하며 살았다. 적절한 주고받기란 당최 불가능했다. 나는 너무 깊어 선뜻 들어가 놀기 힘든 물이었고, 연인은 찰방거리며 놀기에 딱 알맞은 물이었다. 숙의 도중 느닷없이 0 선생이 내게 물었다. 

    

“혼인하면 5년 안에 둘 중 하나가 백발백중 바람피웁니다. 누굴까요?”  


        

초롱초롱한 7-6의 눈에 아연 긴장감이 깔렸다. 바로 다음 순간 설마 자신이겠느냐는 표정이 자리 잡았다. 내가 그 표정을 뒤집는 대답을 하자 잠시 망연한 눈빛으로 앉아 있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영민한 그였으므로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옳고 그름 차원이라기보다 문제를 느끼는 마음 실팍함, 그리고 그 차이가 빚어내는 생명 중량감 차원에서 그가 견딜 수 없으리라는 이야기를 간단명료하게 해주었다.  

    

숙의를 계속하며 7-6은 중첩된 결핍에서 서서히 벗어났다. 5개월 뒤, 그는 연인과 결별했다. 연인은 결별 순간에도 장난기를 거두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7-6은 홀가분하게 돌아설 수 있었다. 사는 동안 우리는 수없이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겪는다. 만남은 기쁘고 헤어짐은 슬프다. 기쁨은 깨달음을 주지 않는다. 슬픔은 깨달음을 준다. 슬픔 각성 여하로 인간 여부가 판가름 난다.  



         

방생    

 

20대 후반인데 30대 후반 얼굴을 하고 7-7이 찾아왔다. 본디 우울증이 있는 데다가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갑자기 파혼을 선언하고 잠적해 버려 창졸간에 마음과 삶이 송두리째 무너져 버렸다. 


           

나는 20대 초반, 1년 사이에 부모를 모두 잃었다. 나이도 어렸을 뿐더러 외동인 내가, 친척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홀로 장례를 포함한 모든 일을 처리할 수는 없었다. 이때 홀연히 초등학교 동창인 한 친구가 나타났다. 그는 망연자실해 있는 나를 다독이며 헌신적으로 수습을 도와주었다. 그는 중단했던 내 학업도 다시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논문을 쓰는 과정까지 희생에 가까운 뒷바라지를 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다. 그 부모님도 두 사람 사이를 인정해 주셔서 결혼을 약속하고 집까지 마련했다. 내 삶이 이렇게 거의 완벽할 정도로 안정을 찾자, 비로소 그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홀로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면 결혼식을 올리자 하고,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났다. 이 가벼운 발걸음이 나중에 너무나 무거운 변화를 몰고 돌아올 줄 그때는 몰랐다. 여행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돌아오자마자 나와 그 부모님 앞에서 그는 돌연 파혼을 선언했다. 더 이상 이런 삶을 살지 않겠으며, 유학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사라졌다. 지금까지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 도대체 뭘 어찌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나는 0을 만났다.  


         

의문 하나로 수렴된 선하고 슬픈 7-7 눈망울이 20년 다 된 지금도 선연히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그를 보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름지기 그는 자기 파괴적 희생으로 사는 동안 서서히 영혼이, 그 내면 힘이 소진되어 갔습니다. 자기 요구와 거절을 봉인하고 오로지 그대만을 위해 몰두함으로써 그 실존은 검은 구멍이 되고, 존재는 잿빛 뼈다귀 되었습니다. 무(無)에 묻혀버린 자기 자신을 발견한 찰나, 그는 가차 없이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가 자기 삶을 찾도록 놓아주십시오. 그 놓음이 기다림일지 포기일지는 천천히 그대가 결정하십시오.” 

    

참으로 아픈 사연이다. 그를 보살피는 동안 자기 우울증이 한없이 깊은 골짜기로 미끄러져 내려갔다는 사실을, 아마도 그와 떨어져 지내면서 어떤 경로를 통해 깨달았으리라. 물론 결별 방식이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당사자에게 그 결단은 최선이었으리라. 친구 희생 덕분에 마음 건강을 되찾은 그라면, 친구가 최선을 다해 내린 결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리라. 그 뒤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숙의를 마치고 일어서는 그 눈망울만큼은 적어도 비관적이지 않았으니, 두 사람 다 잘 견뎌냈으리라 믿고 있다. 단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나는 7-7과 함께 7-7의 삶을 신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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