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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Apr 19. 2024

나나보조 이야기 212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35  


        

소식   

  

나는 다섯 살 무렵, 아버지가 집에서 키우던 개를 죽인 뒤, 그 내장 주무르는 광경을 우연히 목격하고 크게 충격받았다. 그 때문에 결벽증이 자리 잡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동네 노인에게 성추행당한 뒤, 그 증상은 더욱 강해졌다. 급기야 중학생 시절, 야동을 통해 들이닥친 강도 높은 음란함을 더러움으로 인식한 이후, 극심한 병적 상태로 빠져들고 말았다.  

    

하루 7~8시간씩 피가 나도록 손을 씻어댔다. 자위행위를 하고 나면, 손과 성기가 더럽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하루 종일 씻고 확인하느라,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나중에는 소변을 보고도 그랬다. 성폭행의 가해자와 피해자 의식이 번갈아 찾아들면서 성기를 확인하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확인하는 과정에서 증인 역이었던 가족, 심지어 어머니에게 폭행을 가하기도 했다.   

   

이런 상태를 대처하는 데 미숙했던, 그럴 수밖에 없었던 부모는 강제로 나를 정신병원 또는 유사한 수용시설로 4차례나 보냈다. 심지어 개신교 기도원 같은 곳에 가두어 놓고 결벽을 도리어 부추기기도 했다. 결국 복잡하고 거대한 강박 증후군에 시달려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졌다. 5가지 화학합성약물을 처방받아 복용했다. 효과는 미미한데 부작용이 뚜렷하고 다양해, 약을 먹는지 독을 먹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약이라도 먹는다는 심리적 위안 때문에 끊지도 못한 채, 부작용으로 100kg이 넘어버린 몸을 견뎌내고 있었다. 학교는 진즉 그만두었고 아예 외부 생활 자체가 불가능했다. 천신만고 끝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가 찾아간 사람이 바로 숙의 치유자 0.  

     

0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곡진했다. 나는 그 치료 방식과 효과에 놀랐다. 신뢰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또한 온 힘을 다해 치료에 임했다. 한두 달 만에 상황은 몰라보게 호전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외부 생활을 조금씩 재개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안정에 도달하자,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 게 문제였다. 어느 하나가 좋아지면 다른 하나가 불쑥 나타나는 방식으로 헛돌면서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나도 그도 서로 안타까워하며 힘을 내었으나, 좀처럼 타개되지 않았다. 나는 시나브로 지쳐갔다. 어느 순간 나는 더 이상 그에게조차 갈 수 없는 상태로 붙박였다. 나는 어렵사리 그에게 소식을 전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석 달째 못 가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모든 게 멈춰버렸습니다. 

도통 밖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가난했던 부모는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수백만 원이 밀려 있기까지 했다. 나는 이래저래 그에게 미안했지만 달리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도리어 내게 미안하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치료연대는 그렇게 는적는적 뭉그러져 갔다. 얼마쯤 지나 짤막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의 진료소가 사라졌다는···  


        

뮤즈를 위하여    

 

예술적 감수성을 보존하려 정신적 상처와 고통을 그대로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8-2가 찾아왔습니다. 타고난 부분도 있겠지만, 성장 과정에서 가족에게 당한 참혹한 공격을 견디면서 생겨난 고통 감수성을 그는 자기 예술적 영감 자양분이 되도록 했습니다. 서둘러 기계적으로 약물을 통해 치료받기를 삼가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런 자기 생각을 수용해 주는 제게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이 당한 폭력을 치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부모에게서 유기되었는지 그 과정을 극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자기 예술관을 피력하면서 그 계통 기득권세력이 무슨 짓을 그에게 저질렀는지 울분을 토하며 전해주었습니다.      


당연히 그에게는 궁핍이 천형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쥐꼬리만 한 강사료로는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그냥 오라 했더니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다며 잠시 중단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가족 도움은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안타깝지만 저로서도 더는 강권하지 못하고 숙의는 중단되었습니다.    

  

그의 성향으로 미루어 나중에 대박 나는 성공을 거두었으리라 예상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로서는, 그가 지금 자기 정신적 고통을 어찌 대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궁금합니다. 그때 그야말로 악전고투하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심신이 모두 피폐한 상태였습니다. 인상이 날카롭다 못해 귀기가 스치기까지 했습니다. 영양이나 소화 상태도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쓰디쓴 체취를 풍겼습니다. 여전히 그는 그 어둠 속에서 뮤즈를 만나고 있을까요?      

 

우울장애, 양극성장애 같은 정신장애가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 원천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하는 풍조는 진실 여부와 무관하게 여전히 강합니다. 유럽은 한때 일부러 우울장애에 걸리거나 우울장애 환자인 척하는 유행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오죽하겠습니까. 예술이 예술가 병증을 정확히 드러내는 치유 과정 일부라는 측면이 존재하는 한 불가피한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 모차르트, 고흐, 버지니아 울프···뜨르르한 증인(!)까지 있으니 아무래도 이 문제를 의학적으로 간단히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최근 서구에서 양극성장애-정확히는 조증(mania) 상태-와 종교적 엑스터시의 상관관계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적 엑스터시와 예술적 감성 고양이 다르지 않을 테니 결국 같은 문제의식이라 하겠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뇌 과학적 탐색이 핵심을 이룰 듯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그 작업만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더 큰 지평이 있습니다.   

   

인간 정신 전체 지평에서 볼 때 예술적 감성 고양 상태와 양극성장애 조증 상태 뿌리가 전혀 다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쏠림 또는 과잉이 어떤 방향으로 내달리느냐에 있습니다. 방향은 각자 지닌 생명 에너지 전체 맥락과 구체적 역관계가 상호작용하여 결정합니다. 생애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경향성, 경향성에 영향을 끼친 인간관계, 인간관계가 빚은 상처, 상처의 출구, 출구를 대하는 사회적 시선들이 어우러져 다른 길을 갑니다. 마침내는 사회문화적 인식차가 예술가를 정신장애자로, 정신장애자를 예술가로 만들기도 한다는 진실 앞에서 우리는 진중해져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 뮤즈를 만나는 삶은 행복하고 양극성장애 조증을 겪는 삶은 불행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두 경우 모두, 겪는 동안과 그 전후에 어떤 고통을 통과한다는 점에서 같기 때문입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과 소통 불가능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겸허히 기다려야 합니다. 유난히 형형했던 그 청년 눈빛이 기억에 선명한데 중년으로 살아가는 지금은 어떨까 참 궁금합니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내 권리     

 

예순 넘기며 잘 살아온 전업주부인 내게 문제 생길 일이 뭐가 있겠나. 다만, 이곳저곳 아픈 데가 좀 있어서 오늘은 침이나 맞을까 하고 동네 한의원을 찾았다. 문진 과정에서 나는 마음 문제를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마음 치료 전문이라는 0 선생 또한 동네 노인들에게 마음 문제를 일부러 먼저 꺼내지는 않는다고 했다. 침 치료하는 동안 불가피한 경우에만 언급한다고 했다. 침 치료가 끝나고 돌아가기 직전, 나는 나도 모르게 갑자기 0 선생과 잠시 면담이 가능한지 간호사에게 물어봤다. 0 선생 앞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나도 모르게 서두르듯 말했다.  

   

“저···제가요, 아무래도 우울증 같습니다.”    

 

0 선생이 물었다.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내가 대답했다. 

     

“사는 게 즐겁지 않아요.”     


0 선생은 내게 다소 어려운 설명을 건넸다. 

     

“우울증은 꿀꿀한 정서가 깊어진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생각이 일상적 삶을 무너뜨릴 때, 확인되는 자기부정을 의미합니다.”  

   

나는 단호히 말했다.   

   

“일상을 사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어요.”     


0 선생은 내게 도발을 포함하는 질문을 던졌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우울증은 없습니다. 전혀 문제없는 일상적 삶이란 어떤 것인가요?”  

   

나는 자부심을 가지고 내 지난 삶을 단계별로 정리했다. 어려서는 어머니 뜻에 맞추어 공부 잘해서 원하는 대학 갔다. 결혼해서는 남편 뜻에 맞추어 화목을 이루며 잘 살아냈다. 부모가 되고서는 아이들 뜻에 맞추어 잘 양육했다. 나 자신이 짊어진 의무를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한 적 없었다. 지금 경제적으로도 풍족하다.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다. 0 선생은 가차 없이 잘라 말했다. 

    

“바로 그게 무너진 삶입니다.”   

  

나는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짊어진 의무 말고 거머쥔 권리도 있다는 사실이 전혀 증명되지 않은 삶 그 자체가 우울증이라는 설명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권리를 보전해 주지 못한다는 말에는 잠시 갸웃했지만 이내 수긍했다. 내 삶 주체성을 복원하기 위한 전사로 서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각기 그들이 짊어져야 할 몫을 넘겨주고 내 권리를 거머쥔 삶으로 이동하는 이치를 간단하게 덧붙여 설명해 주었을 때 나는 뭔가가 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남편이 치료받아야 하겠네요.”   

  

구태여 따진다면 내 남편도 치료가 필요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내 삶을 바꾸는 이야기를 하는 시점에서 나는 왜 다른 사람을 떠올렸을까? 내 속을 나도 몰라 당황해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기라도 한 듯, 0 선생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자신을 가볍게 여길 뿐만 아니라 자신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에 생긴 병조차 가볍게 여깁니다. 자기 병을 치료하기 위해 드는 돈과 시간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재빨리 다른 사람이 지닌 무거운 문제 쪽으로 예의 그 의무감을 발동시킵니다. 자신보다 남편, 아이들 문제가 더 무겁다고 판단하며 살아온 평생 습관이 그를 그렇게 만듭니다. 우울증 환자들이 이만하면 됐다거나 더는 안 된다는 핑계를 대며 서둘러 치료를 중단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 인생과 병을 육중하게 여겨야 즐거운 삶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 뒤 내가 그 한의원에 다시 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 집 강아지가 더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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