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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Apr 29. 2024

나나보조 이야기 220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43



죽음 뒤에서 

    

어느 날, 낯선 번호 하나에 스마트폰이 전신을 부르르 떤다. 습관이 만든 촉에 의거 대뜸 끌까, 하다가 문득 받으니 젊은 여성이 내 이름 뒤에 ‘아저씨’를 붙이고 맞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자 자신을 9-5-1의 큰딸, 9-5-2라 소개한다. 9-5-1, 그는 얼마 전 세상 뜬 내 고교 동창이다.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여러 곳에서 내 전화번호가 발견되어 대체 누군가, 궁금했단다. 생애 마지막 무렵 아주 힘들 때, 숙의 치유를 해준 친구라 하니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만나 달라고 한다. 진료를 끝낸 뒤, 근처 음식점에서 마주 앉았다.



죽은 내 아버지 9-5-1은 아주 어두운 유년기를 보냈다. 나이 차가 많은 씨 다른 큰 누이, 그러니까 내 고모한테서 모질게 학대당했다. 그 원한 감정을 끝내 떨치지 못한 채 우울증, 알코올중독, 간암으로 이어지는 어둠 속에서 헤매다, 쉰여덟 어느 이른 여름날, 큰누이가 살고 있는 이 행성을 영원히 떠났다. 그 마음 한 자락 붉은 곳에 손이 닿았던 인연으로, 0 아저씨는 그 딸인 내 마음까지 다독여야 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나는 연신 눈물을 훔치며 이야기를 들었다. 자주자주 아저씨 말을 메모해 가며.


0 아저씨는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말해 주었다. 좀 더 일찍 아버지 상태를 질병으로 인식하고 치유 관지를 확보했더라면 결과는 매우 달랐으리라, 가 그 하나다. 사실 아버지는 마지막 가는 길목까지 어머니와 우리 자매한테 철저히 외면당했다. 과도한 음주와 폭력으로 가족 모두를 피폐하게 해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가족은 한결같게 아버지 상황을 인격과 윤리 차원에서 이해하였으므로 치료는 물론이고, 용서도 화해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가족 이름으로 벌어지는 흔한 살풍경이다.


다른 하나는 가족 모두 특히, 어린 내 여동생이 필연적으로 입었을 상처 이야기였다. 0 아저씨는 여동생이 아버지한테서 관통상을 입었음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현재 아버지를 똑 닮은 남자친구에게 집착하여 어머니와 내 속을 태우고 있다. 상처가 내면화되었다는 증거다. 떠난 사람, 떠난 것이 결단코 아니다. 상처로, 질병으로 엄연히 머물러 있다. 시급히 치유 받게 해야 한다고 0 아저씨는 당부했다. 가능성이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아서인지 거듭거듭 강조했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빗발을 뚫고 돌아가는 9-5-2의 가벼울 리 없는 발걸음을 보면서 한참이나 서 있었다. 딸에게서 아버지 모습이 꽤나 많이 어른거리는 풍경을 본 터라, 내 발길 역시 비에 젖은 그 이상으로 무거웠다. 빗속에 우두커니 서서 생각을 낭창거리게 해보았다. 죽은 9-5-1이 딸을 내게 보냈음에 틀림없다는 가벼운 대칭 작용이 일어났다. 나도 빗속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나직나직 높이  

    

비범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해서 오래 기억난다는 법은 없다. 평범해서 오히려 뇌리에 깊이 박히는 사람이 있다. 평범함이 비범함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오랜 인습을 버리면, 평범함에 깃든 은은한 숭고를 목도할 수 있다.   

   

9-6은 평범 화신 같은 사람이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말투도 웃음도 울음도 직업도 모두 평범이라는 인감을 찍어놓은 사람처럼 보였다. 심지어 그 우울장애조차도 평범하다고 고백하는 듯했다. 그와 숙의하는 과정도 똑 그와 같았다. 그 스스로도 그렇게, 나 또한 그렇게, 평범하게, 나직나직, 우울과 삶을 이야기해 나갔다.  

     

우수 서린 눈, 허스키 목소리, 느릿느릿한 말투에서 이미 그 내면 전경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생애 초기부터 똑똑하지 못해서, 잘생기지 못해서 공공연히 비교당하며 살았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그에게 인정해 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가 말했다.    

  

“어머니는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제 상처를 덧나게 했습니다.”   


       

나는 학교에서도 대부분 아무런 존재감이 없거나 소외된 채로 지냈다. 대학에 와서는 우울증 상담 치료를 받기도 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과정도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교사가 되고 나서도 내 능력에 늘 불안을 지니고 살았다. 아이들과 상대하는 일도 어렵기만 했다. 새 학년도나 새 학기가 시작되면 우울은 어김없이 깊어졌다.   

   

0 선생과 숙의 치유를 하면서도 나는 여일한 반응을 보였다. 눈에 띄게 좋아지지 않았다. 나 스스로도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눈에 띄게 좋아지지 않는다고 실망하지도 않았다. 나는 0 선생이 민망해할 정도로 담담하게 숙의를 계속했다. 이 신근한 평범함이 부지불식간에 나를 나직나직 높은 곳으로 이끌어갔다. 어느덧 나는 행복 기본값이 한 뼘 높아진 삶을 살고 있다.    

  

그렇게 0 선생과 맺은 인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연애하고 혼인하고 아이 낳고 양육하는 긴 과정 내내 나는 가족과 함께 종종 그를 찾아갔다. 극적인 감동과 보람을 안겨준 어떤 사건보다 내가 이 숙의와 만났다는 사실은 보석 같다. 보석이 지니는 가치는 스스로 빛나는 데에 있지 않고, 누군가 소중히 간직해 주는 데 있다는 깨달음을 준 인연이었다. 혹 이 인연이 평범하게 스러지더라도 나는 그 평범함에 둘러싸이고, 그 평범함을 둘러쌀 작정이다. 



마법  

   

6척 거구 80대 중반 노인이 압도적 아우라(aura)를 뿜어내며 한의원으로 들어섰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병들어 치료받으러 왔다고 하기 어려운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본인도 그다지 내켜 하지 않는 판이었습니다. 제자가 자신이 강권해 모시고 왔다고 했습니다. ‘예전에 몇 번 이렇게 모셨더니, 한의원 가까이 이르면 만나지 않고도 먼저 한의사 면면을 예지해 발걸음을 돌리시곤 했다. 여기 오시면서는 아무 말씀 없으셨다.’라며 웃었습니다.   

    

노인이 인정하는 증상은 단 하나였습니다: 손바닥이 뜨거워서 한겨울에도 차디찬 얼음주머니를 손에 쥐고 있어야만 할 정도라는. 여타 문진 모든 사항을 노인은 ‘아니오’라고 답했습니다. 저는 배, 혀, 맥박을 통해 간결한 정보를 얻어내고 단출하게 설명했습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본디 병도 없고 약도 없느니!”  

   

의자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저도 노인의 말이 지니는 큰 맥락을 익히 아는 바라, 빙그레 웃어드렸습니다. 한의원을 떠나며 제자가 말해주어 비로소 그가 불자 가운데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대우(大愚) 법사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는 잠시 고민했습니다. 신체 증상이지만 노인 특성상 그 마음 상태를 고려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좀 더 정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대우 법사의 영적 권위에 흔들렸다고 해야 맞습니다. 회심의 일방(一方)을 날렸습니다. 실패였습니다. 탕약을 전량 폐기했습니다.  

    

저는 다시 고민했습니다. 노인 심사를 고려한다는 일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언어 소통을 누락시킨 마음 고려가 실패 요인이라는 판단이 섰습니다. 저는 언어 소통을 처방 기조로 삼기로 했습니다.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르신, 지난번은 제가 탐심에 들었습니다. 이번은 무심탕(無心湯)입니다.”    

 

제가 무심탕이라고 명명한 탕약 한 제를 노인은 생전 처음으로 모두 복용했습니다. 노인은 탕약 효과에 묵묵부답이었으나, 측근 전언에 따르면 탁효가 났음이 분명했습니다. 탁효 8할은 마음 작용이었을 터입니다. 마음 작용은 무심탕이란 말 한마디 작용이었을 터입니다. 무심탕이란 말 한마디 작용이 본디 병도 없고 약도 없다고 했던 자기 언어를 전복시킨 결과를 낳았을 터입니다. 자기 언어를 전복시킨 결과가 노인을 침묵하게 했을 터입니다.   

   

이 또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대우 법사 자신이 언어 이외에 어떤 방편도 인정하지 않는 독특한 수행 철학을 지닌 분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세상에 마법이 참으로 존재한다면, 유일한 마법은 언어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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