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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May 01. 2024

나나보조 이야기 222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45  


        

기본값 

    

박완서 『창밖은 봄』을 각색해 만든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40년도 훨씬 넘긴 기억이라 전체 서사는 가물가물하다.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는 한 대목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굴뚝이나 하수도 따위를 고쳐주며 살아가는 남자와 식모살이하며 살아가는 여자가 어렵사리 만나 부부 연을 맺었다. 신산한 삶 틈바구니에 재수 좋은 한 날이 끼어들었다. 그래봐야 푼돈이지만 남자에게 여느 날보다 많은 돈이 생겼다. 남자는 생선 한 손을 사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들어선다. 여자는 함박웃음 지으며 반색하다가 이내 어두운 표정을 짓는다.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여자가 (정확히 똑같지는 않지만 같은 내용으로) 이렇게 말한다.  

   

“겁이 나요. 우리 이렇게 잘살아도 되는 거예요?” 

    

생선 한 손이 겁날 정도 행복이라는 저 야트막한 기본값. 듣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어 왔다. 

     

우울장애 가운데 서구정신의학 눈에는 포착되지 않는 유형이 있다. 보통 사람과 비교해 행복 기본값이 현저히 낮은 사람들이 전 생애에 걸쳐 부단히 자기 행복감을 착취당하면서 살아가는 경우다. 착취자는 그들을 두 부류로 갈라쳐 무력하게 만든다. 한쪽은 착한, 겸손한, 사심 없는, 헌신적인,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 칭찬한다. 다른 한쪽은 나약한, 게으른, 쓸모없는, 사회에 짐이나 되는 물건이라 질시한다. 그들은 그렇게 서서히 가라앉는다. 아무도 그들을 우울장애라 하지 않는다. 스스로도 그냥 그리 사는 것에 맞추어 간다.    

  

바로 이 유형을 나는 ‘인생 기조로 자리 잡은 우울장애’라고 부른다. 물론 겪는 개인을 중심으로 명명했다. 큰 맥락에서 보면 ‘지배체제가 기획하는 정치·경제학적 우울장애’ 정도로 명명할 수 있겠다. 아프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뭐 달리 길이 없지 않냐, 는 그들 현실 수용은 다만 개인 체념이 아니다. 사회적 억압이기도 하다. 이런 비대칭 대칭을 알면서도 개인 차원에서나 아픈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는 치료자에게 이 문제는 늘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안겨준다.    

 

한쪽은 심각한 알코올중독이고 다른 한쪽은 평생 철부지로 살아가는, 그마저 이혼한 부부를 부모로 둔 10-2가 다소 초점을 잃은 눈빛과 함께 찾아왔다. 불안감과 우울감이 결합해 여간 단단해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그에게서 나타난 불안 지수는 내가 본 수치 가운데 가장 높았다. 발작과 자해 양상은 이루 다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가족 가운데 누구 하나 이런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고 불평했다. 그 위중한 상태는 정신뿐만이 아니었다. 몸도 직업도 연애도 미래도 한결같은 불안감과 우울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더욱더 안타깝게도 모든 어둠에 그 자신 스스로 이상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뭐라 딱히 묘사하기 어려운 소외가 그와 문제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다. 명료하게 자기 문제를 알아차리고 단도직입으로 다가가는 기미가 거의 전혀 없었다. 아프고 힘들다는 감각과 기쁘고 즐겁게 살아야겠다는 애착이 맞물리지 않아 둔하고 모호하게 움직였다. 주고받는 대화도, 사려 깊은 강의도 속 깊게 끌어안지 못했다. 첫날과 넷째 날과 여덟째 날 거리가 모두 같았다! 낮디낮은 행복 기본값이 육중하게 그 영혼을 찍어 누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어느 날, 그가 전화해 상담 예약을 한 주 뒤로 미루었다. 공감했다. 다음 주에는, 시간이 되면 연락하겠다고 했다. 이해했다. 결국, 다시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받아들였다. 그러면 아뜩한 저 바닥에 웅크린 채 뭐라 웅얼거리는 그 환영이 떠오르곤 했다.    


       

  

   

어르신이란 표현이 이제 막 어울릴 듯 보이는 초로의 10-3이 깍듯한 공간만을 점유한 채 0 앞에 앉아 있었다. 얼핏 보아도 자기 병약함과 까칠함을 자랑 또는 무기로 삼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겸손한 태도와 정중한 말투는 교육자였던 그 직업에서 나온 매너일 뿐 그는 결코 겸손하거나 정중하지 않았다. 자기 병약함과 까칠함이 누군가 공격하고 학대했기 때문이라는 확신을 지녔으므로, 그는 겸손한 태도와 정중한 말투로 무장하고 늘 그 누군가를 비난하고 원망했다. 같은 말을 끝없이 되풀이했다. 0의 진단과 처방을 수용하는 듯하다가도 이내 자기 생각으로 돌아가곤 했다.     


10-3은 두 차례에 걸쳐 제법 오랫동안 0과 숙의 치유를 했다. 그 사이 휴지 기간이 생긴 까닭은, 0이 고통 원인이 그가 지목한 사람에게만 있지 않다는 의학적 진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0이 새로 지목한 사람에는 부모와 자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반발은 격했다. 필경 0은 배신자였을 터이다. 그가 치료와 동조를 혼동했으니 말이다. 숙의는 즉시 중단되었다. 이 년가량 시간이 흐른 뒤 무슨 연유에선지 그는 태연히 전과 같은 얼굴로 0 앞에 나타났다. 0 또한 태연히 전과 같은 얼굴로 그 앞에 앉았다.   

    

10-3은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겸손한 태도와 정중한 말투로 자신을 공격하고 학대한 사람을 비난하고 원망했다. 0 또한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그 말을 경청했다. 10-3이 지치지 않았으므로 0도 지칠 수 없었다. 다만, 0은 10-3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10-3도 0의 말에 전적으로 찬성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전과 전혀 달리, 0은 단칼에 문맥을 잘라버렸다.   

   

“어르신, 이는 견해차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의학적 진단 결과를 말씀드렸습니다. 이 의학적 진단은 진실 전체 맥락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어르신 찬성을 기다려 타당 여부가 가려지는 사안이 아닙니다.”    

 

확 깨는 듯, 어안이 벙벙한 듯, 10-3은 한참을 침묵한 채 앉아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0이었다.  

    

“숙의는 말 그대로 깊게 의논하는 일입니다. 돌이켜 보면 아실 테지만 지난 많은 시간 동안 어르신께서는 오로지 본인 말씀만 해오셨습니다. 제가 제 말을 하는 순간, 발길을 끊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 치료는 편들기가 아닙니다.”     


지극히 진부한 말이다. 치료 과정에서 아픈 사람 말에 귀 기울여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은, 문제 되는 그 심리적 실재를 여실히 보아 진실 전체 맥락을 잡으려 함이지, 덮어놓고 편드는 작업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바로 이 대목에서 걸려 넘어진다. 10-3이 왜 다시 0을 찾아왔는지 끝내 알 수는 없었다. 추측건대 0에게 다른 기대를 했다기보다, 그대로는 살 수 없겠다 싶고, 막연히 어떤 돌파구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결국 10-3은 의학적 소견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다른 이유를 들어 숙의를 완전히 그만두었다.      


10-3은 그 뒤 이따금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 자기 마음에 걸려 있던 질문을 불쑥불쑥 던지곤 했다. 0은 평가 없이, 반박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답해주었다. 5년쯤 시간이 흘렀다. 바람결 소식에 따르면, 10-3은 비난과 원망을 전혀 하지 않은 생때같은 가족 한 사람을 잃었다. 이제 남아 있는 그의 편은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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