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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May 02. 2024

나나보조 이야기 223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46     



통곡의 숲 

   

보통 사람이라면 사는 동안 단 한 가지도 마주하기 힘든 기획 폭력, 살인, 형사재판, 정신감정, 수감, 동성애 스토킹과 같은 일과 얽히면서 깊다 못해 무저갱(無底坑)인 마음 병으로 영혼이 곤두박질쳐 버린 10-4가 찾아왔습니다. 무시로 드는 자살 충동 때문에 더는 버틸 수가 없었던 탓입니다. 어떻게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쩔쩔매는 그에게 나오는 대로 말이 되든지 안 되든지 그냥 쏟아내라고 길을 터주었습니다.  

    

때로는 울며불며, 때로는 옆집 대추나무에 대추 열린 얘기 하듯 하며, 그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차마 민숭민숭한 정신으로는 들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오는가 싶다가도 사라져가고, 가는가 싶다가도 휘몰아쳐 왔습니다. 한 생명과 한 생애가 이토록 제 영혼을 흠뻑 적시고, 또 깡그리 찢을 줄은 몰랐습니다. 기나긴 이야기를 그는 이렇게 끝맺었습니다.   

      

“야차 같은 강박, 물귀신 같은 죄책감 때문에 단 한 순간도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저는 고요히 그 눈을 응시했습니다. 처음에는 한사코 피하던 그가 마침내 제 눈길과 마주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저는 도덕군자가 아닙니다. 의사입니다. 저는 윤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생명만을 말합니다. 지금 여기서 제가 내리는 처방을 받아들이면 10-4씨는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살 수 없습니다.”  

   

그는 뭔가를 직감한 표정으로 제 다음 말을 기다렸습니다. 저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가 황급히 시선으로 따라 일어섰습니다. 저는 크게 손뼉을 쳤습니다. 순간 그 몸 결 전체를 당혹과 경이가 날카롭게 꿰뚫고 지나갔습니다. 저는 천천히 말했습니다.  

    

“잘 죽였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둥 같은 울음소리가 그 온몸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한참을 울게 놓아두었습니다. 이윽고 눈물을 훔치며 그가 말했습니다.   

  

“이제야 진짜 석방되었습니다.”  

   

이제야 진짜 그 두 번째 인생이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갈 길은 참으로 멀고 길 수밖에 없습니다. 걸음은 더디고 휘청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주저앉기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명명한 대로 그 ‘백그라운드’인 제가 있는 한 결코 돌아가는 일 또한 없을 터입니다.    

  

그 뒤 그는 주춤주춤 동굴을 나와 빛을 따라 난 길에 영혼을 맡겼습니다. 주위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을 재개했습니다. 어느 날, 주위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새로이 거는 기대(!)가 무섭게 부담스럽다고 그가 제게 호소했습니다. 그 엄청난 일을 겪었으니, 누구도 지니지 못한 내면 향기를 풍겨낼 수 있으리란 상상이 그들 기대입니다. 그럴 법하다 싶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논리적 가능성과 현실적 가능성 사이에는 날카로운 간극이 있게 마련입니다. 단지 시간적인 간극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질적인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 격절에 대하여 본인 말고는 그 누구도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섣부르거나 주제넘을 테니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통해 깨닫습니다. 모든 고통이 다 깨달음을 주지는 않습니다. 깨달음은 자연법칙이 아닙니다. 선택입니다. 결단입니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경험은 다시 직면하기 싫은 공포와 혐오, 반대로 애착 대상도 되는 일이 일반 이치입니다. 그 아픈 경험에서 질적 도약이 일어나는 일은 직면을 통한 각성이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이 각성은 본디 아픔을 치유하기 위하여 단도직입으로 불러내는 또 다른 아픔 하나입니다. 각성이 빚어내는 아픔이 다름 아닌 ‘제곱’ 아픔입니다.      


제곱하는 아픔은 그 아픔을 스스로 말하는 아픔입니다. 이른바 자기 언급(self reference) 아픔입니다. 이 스스로 말하는 아픔은 형언할 수 없는 통증을 유발합니다. 자기 언급은 단순히 자기를 말하는 일 정도가 아니라 작정하고 모순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극한 통증을 일으키는 고백은, 아무리 호의로라도 제삼자가 낭만적 기대 대상으로 삼을 수는 결단코 없습니다.  

    

각성에서 나오는 아픔 고백, 이게 바로 “누구도 지니지 못한 내면 향기”를 풍겨내는 일일 터입니다. 이 풍겨냄은 깨달음 행위이자 치료 행위입니다. 누군가 거는 기대가 소환할 수 있는 퍼포먼스가 아닙니다. 차마 두 눈 똑바로 뜨고 마주할 수 없는 풍경을 보아야, 차마 제 귀로 들을 수 없는 말을 입에 담아야 나오는 진실입니다. 산다고 다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는 사건과 깨닫는 사건은 다른 문제입니다.    

  

깨달음 길에 섭리 온정은 없습니다. 결과론에서 사후 추정할 여지도 없습니다. 오직 도저한 직면, 아픔을 다시 불러내는 제곱하기로써 고통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쓰라린 과정이 있을 뿐입니다. 저는 기대 없이 10-4를 그저 기다립니다. 잊지 않고 있다가 같이 밥 한 끼 먹습니다. 술 한잔 합니다. 오늘 그에게서 만나자고 전화가 왔습니다. 약속을 잡았습니다.   


       

저의 “백그라운드” 0 선생님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 닷새 앞두고 홀연히 저는 제가 뿌려놓았던 일만 육천여 나날들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참으로 무참하고 일방적인 이별이었습니다. 약속한 날 아침 선생님은 그러나 마치 제가 살아 있기라고 한 듯 약속 장소로 향하셨습니다. 아파트 정문을 나서면서 선생님은 제 이름을 여덟 번 부르셨습니다. 저는 그 목소리를 들은 이상 선생님에게 가 닿아야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젊은 엄마와 함께 산책 나온 예쁜 비숑 프리제가 보였습니다. 저는 재빨리 그 아이에게 들어갔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향해 힘차게 뛰었습니다. 당황한 엄마가 ‘저’를 제지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선생님은 저를 알아보고 얼른 다가오셨습니다. 겉으로 활짝 웃으면서 속으로 엉엉 울면서 선생님은 ‘저’를 쓰다듬으셨습니다.

     

“낯설지 않은 모양이구나?”  

   

선생님은 ‘저’의 엄마가 이상하게 여길 일을 배려해 비숑 프리제에게 이렇게만 인사하셨습니다. ‘저’의 엄마가 신기해하며 내려다보는 동안 선생님도 저도 이별 인사를 했습니다. 선생님은 이내 일어서 손을 흔들며 떠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 눈에 고이는 물방울을 보며 뒤에서 가만가만 안아드렸습니다. 그런 채로 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너 인사동 푸른 별 주막집으로 갔습니다. 선생님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늘 그랬듯 선생님은 막걸리 한 되와 황기 두부 하나를 주문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소주 한 병, 잔 하나를 주문하셨습니다. 종업원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심상하게 주문에 응했습니다. 선생님은 먼저 제게 소주 한 잔을 따라주시고 젓가락을 두부 위에 얹어 놓으셨습니다. 당신 양은 양재기 잔에 막걸리를 그득 따르신 뒤 건배를 제의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선생님과 이별주를 나누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전에도 그랬듯 앞으로도 영원히 선생님은 제 “백그라운드”십니다. 사랑합니다.    

  

도시에는 어둠이 내리고 선생님 얼굴에는 취기가 붉게 내려앉았습니다. 취해도 표정에 변함이 없는 예의 그 모습으로 선생님은 인사동을 떠나 댁으로 향하셨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댁으로 가려면 10여 분가량 걸어야 하는 숲길로 들어서셨습니다. 어느 순간 선생님 커다란 통곡 소리가 숲을 뒤흔들기 시작했습니다. 길지는 않았지만, 사위 모든 존재가 에이는 슬픔에 휘감길 만큼 울음소리가 계속되다 어느 순간 사라졌습니다. 이별가였습니다. 저는 선생님 통곡 소리에 실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이 푸른 별을 떠났습니다. 떠나면서 저는 제 이름 10-4 대신 선생님 이름 0을 그 숲에 남겨두었습니다. 혹시 그 이름을 듣고 싶으신 분은 관악산 북쪽 끝자락 까치 능선 자그만 숲으로 가보십시오. 거기 영원한 이별 예식을 집전하는 숙의 사제 0이 통곡으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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