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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May 07. 2024

나나보조 이야기 227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49  


        

77번째그 마지막 편지

     

나는 공황장애와 강박장애, 그리고 우울장애에 굳게 결박당한 채 살아가고 있는 30대 남자 사람이다. 나는 누군가의 소개로 만난 0 선생과 숙의 치유를 해왔다. 약속된 상담 말고도 무려 76통의 편지를 보내 이야기를 계속했다. 카카오톡으로도 수백 아니 천 통 넘는 문자를 보냈다. 0 선생은 필요에 따라 간단히 또는 소상히 답신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선생님! 

오늘도 마음 아픈 사람들이 숙의 치유실을 찾았겠지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저와 같은 병을 앓고 있어서 위로받기도 하고,

그들이 그늘지고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막막함을 느끼기도 하는 요즘입니다.


선생님!

그동안 늘 제게 깊이 마음 써주시고, 늘 그 마음 표현해 주시고, 늘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선생님 마음 문이 언제나 그렇게 열려있다는 사실이 제게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모릅니다.    

 

저는 선생님과의 인연을 언제까지라도 끊고 싶지 않습니다. 그 관계가 정말 스승과 제자, 더 나아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처럼 특별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처한 현실을 그렇지 못합니다. 이런 편지가 더는 이어질 수 없을 듯합니다.


제가 밝게 웃으며 선생님을 찾아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는 날이 언젠가 꼭 오리라 믿으며 여기서 인사를 올려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부디 안녕하시기를···”   


       

11-2에게 바깥으로 현저히 드러나는 고통은 공황과 강박이었다. 공황과 강박이 그토록 강고하고 질기게 떠나지 않는 원인은 숨어 있었다. 뿌리 깊은 자기부정, 그러니까 우울이었다. 우울은 공황과 강박을 입에 문 채 어둠의 심연으로 내려가는 물귀신이었다. 그 물귀신은 부모의 은근하면서도 단호한 차별적 양육 태도가 불러들였다. 은근한 차별은 차별을 차별로 느끼지 못하게 했다. 단호한 차별은 차별을 깨뜨리지 못하게 했다. 무감과 무력의 관성이 문제를 직면하는 힘을 갉아먹었다. 공포에 떨 뿐이었고 한사코 반복할 뿐이었다.  

    

크게 두 번 고비를 넘기며 치유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무렵 문제 핵심으로 접근하려던 내 시도는 가로막혔다. 숙의는 돌연 중단되었다. 모든 연락이 끊어졌다. 11-2가 어찌 사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환경이 달라지지 않는 한 그에게 그리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와 내가 극진함으로 나누었던 숱한 말들이 종자로 남아 있다가 적절한 때, 새로운 영혼으로 싹트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 단단한 현실 너머 어딘가 불가피한 가능 성지를 전 ‘재산’ 털어 사두어야 하겠다.  



        

5천 원   

  

한 초로의 남자 사람 11-3과 불면증 (그리고, 본인은 부정했지만, 뿌리 깊은 불안) 때문에 숙의했습니다. 숙의하는 동안 그는 제게 이 숙의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교묘한 방식으로 보냈습니다. 늘 이런 식이었을 터이므로 차후 지속해서 치료받을 다른 의료인이 없음도 분명했습니다. 저는 사태를 직감하고 치료비를 받지 않겠다고 명토 박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상담받은 만큼 상응하는 치료비를 내고 가야 마음이 편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시는 대로 받겠다고 하고 직원에게 그리 일렀습니다. 나중에 확인한바, 아뿔싸, 5천 원을 주었다고 합니다! 빅터 프랭클 내용으로 훈수할 만큼 지적 수준이 있었던 그이기에 제가 받은 충격은 작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 대학병원 들렀다가 오는 길인데, 의사가 30초가량 말하고 바로 처방을 내렸다면서 너무 성의 없어 이리 왔다고 했습니다. 30초 무성의를 질타하는 마음과 2시간가량 숙의한 후 5천 원을 내미는 마음이 과연 하나의 결일까,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분명 모독인데 그에게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날 이후, 제법 긴 시간 동안 저는 참담한 심경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같은 시간 동안 숙의하고 나서 대단히 고맙다며, 이것밖에 안 받느냐며, 10만 원에 5만 원을 더 얹어주고 가신 어떤 중년 여자 사람에게는 그러면 제가 사기를 쳤을까요? 적어도 이 5천 원이 두 시간 치료비로 합당하다면 말입니다.     

 

심란하고 일 안 풀릴 때 찾아가서 역술인에게 내는 ‘상담료’를 생각한다면-6년 동안 대학 교육받고 국가고시를 통과한 일이 신내림보다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의료인에게 2시간가량 숙의 치유 받고 5천 원을 건네는 상황은 아무리 보아도 사회통념에서조차 벗어나 있는 풍경이 아닐까요? 예. 좋습니다. 제가 받은 대우가 그럴만하다고 받아들이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실은 그 5천 원이 제게 내린 평가만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즉 그 자신에 대한 평가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자신이 고작 5천 원“짜리” 숙의 치유를 선택해서 2시간가량을 허비해 버렸으니까요. 저를 우스갯거리로 만듦으로써 결국 자신을 모독했다는 처연한 사실. 이점을 헤아리지 못한 모양입니다.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숙의 치유를 업신여기는 것일까요? 말에 대한 근본 관념 때문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양에서 말은 내 남을 구별하고 쌍무적 계약을 맺는 공공 수단으로 인식됩니다. 말이 곧 기회요 권력이요 돈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기나긴 과정에서 합리적 시민사회가 성립했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에게 말은 서로 연속성을 확인하고 경계를 허무는 사적 수단으로 인식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말 가치를 침묵 아래 두는 고답적 흐름이 자리 잡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말을 막 하는 비속한 흐름이 자리 잡았습니다. 극단적 분열이지요. 말을 통해 사회관계를 조절하고 병을 고친다는 개념에 취약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동력은 두 가지입니다. 그중 하나가 남이 나를 인정해 주는 힘입니다. 어찌 보면 사람 한평생이 남한테 인정받으려 애쓰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마음이 병들어 고통당하고 있을 때, 내 고통에 귀 기울여 알아차리고 인정해 주는 남이 건네는 힘이란 실로 감동적인 무엇입니다. 이것이 바로 숙의 치유가 지닌 눈부신 가치입니다. 글쓰기에 치유 힘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이 점에서 숙의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약 따위로는 애당초 접근조차 안 되는 부분입니다. 요컨대 숙의 힘은 곧 경청 힘이요, 경청 힘은 곧 인정 힘입니다. 그 힘으로 아픔을 딛고 일어섭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또 하나 힘은 바로 스스로 인정하는 힘입니다. 남이 아무리 자신을 인정해 주어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면 그만입니다. 허무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상처를 지닌 사람은 스스로 인정하는 힘이 약하거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숙의 치유를 통해 남한테 인정받는 순간, 그렇게 인정받는 자신을 가치 있고 아름다운 존재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마른 펌프에 마중물을 부으면 물이 쏟아져 나오는 이치와 같습니다. 결국 내 인정조차도 남 인정에서 도움을 받으니 숙의 치유란 참으로 기막힌 연금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숙의 치유 연금술은 바로 다음부터 그 진면모를 드러냅니다. 인정 문제를 넘어서, 생존 동력 문제를 넘어서, 직접 치료가 일어납니다. 마음 아픈 사람 그 아픔이 치유자에게 흘러들어 ‘감염’됨으로써 공유되고 공유됨으로써 풀어집니다. 자기 아픔을 남에게 흘려 ‘감염’시키는 사람이 그 고소하고 달짝지근한 행복감(!)을 스스로 느끼느냐, 여부와 상관없이 치료는 이미 엄연하게 진행되는 중입니다. 물론 아픔만 ‘감염’되지 않습니다. 아픔을 지닌, 아픔보다 큰, 그 아픈 사람 가치와 아름다움도 ‘감염’됩니다. 동시에 반대로 치료자 생명력과 인격도 마음 아픈 사람에게 흘러들어 ‘감염’됩니다. ‘감염’을 주고받으며 치유자와 마음 아픈 사람은 치료와 삶을 연대합니다. 이 연대 무한 연쇄를 꿈꾸는 시공에 숙의 치유는 빛나는 미학을 창조합니다. 

 

이런 사실에 터 해 말한다면 숙의야말로 근원적 인간 조건입니다. 모든 존재는 비대칭 대칭구조 안에 있고, 그 비대칭 대칭을 자발적으로 깨뜨리는 운동으로서 생명 현상 한가운데 인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인 한 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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