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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May 06. 2024

나나보조 이야기 226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49


          

직업병   

  

숙의 치유 진행 중인 11-1이 진료가 막 끝난 한의원으로 전화를 해왔습니다. 저를 만나기 위해 이미 택시를 타고 출발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상태로 집에 있기가 너무 힘들어요. 며칠 만이라도 밖에서 지내고 싶습니다. 우선 오늘 밤 여기서 재워주시면 안 될까요?”  

   

가족 간에 상처를 주고받아 매우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는 중이라는 사실을 익히 아는 터라, 저는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배고픈 표정을 짓기에 근처 치킨 가게에 들어가 따뜻한 닭튀김을 먹이면서 부드럽게 대화를 계속했습니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함께 택시를 타고 그의 집을 향했습니다. 현관 앞까지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니, 새벽 두 시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문득,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질문이 솟아올랐습니다. 잠에서 억지로 깨어 졸린 눈을 비비며 아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 얼른 대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의자가 일반적으로 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혹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건 지나치다 싶은 생각, 누구라도 하겠지요. 애당초 그런 전화를 허용해서 문제다, 전화를 받더라도 오라고 해서 문제다, 만나서 대화하더라도 데려다줘서 문제다, 그렇게까지 하고 나서는 더럭 ‘이게 뭐지?’ 해서 문제다··· 어디까지가 의자 행동반경인지, 어디부터는 넓은 오지랖 문제인지, 아니면 아예 자기 파괴적 희생에 지나지 않는지··· 판단하기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마음을 치료하는 일을 하겠다고 나선 의자인데, 어찌 보면 다른 의자보다 이런 점에서 자상함과 대범함을 두루 갖추고 있어야 맞습니다. 물론 우리 의료 현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자체가 매우 관념적이고 순진하다는 증거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돈으로 연결되지 않는, 물색없는 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직업이 소득 여하로 평가되는 현실 안에서도 의업만큼은 상대적으로 휴머니즘이라는 윤리적 기반을 더욱 든든히 지녀야 한다는 소신을 지니는 한, 이런 요청을 일소에 부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끝내 이런 딜레마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터입니다. 성자 아닌 평범한 의자로서 지닐 수밖에 없는 숙명적 한계일 테지요.  

    

“하필 내가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이 한 축을 이룹니다. 돈도 명예도 힘도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제 앞가림도 넉넉히 못 하는 주제에 속없는 짓을 하는 게 아니냐는 질타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런 질문이 다른 한 축에 있습니다.   

   

“사실 나야말로 이런 삶을 사는 게 제대로 된 길 아닌가?”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고친다는 깊은 이치로 따지면, 이 질문은 구태여 답을 요하지 않습니다. 매 순간 자기 아픔 때문에 자기 내면 가장 깊숙한 곳을 향한 질문이 솟아오를 때, 귀 기울이는 한마디가 있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했다는 일곱 마디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이 말이 어떤 울림을 주는가와 무관하게 저는 제 방식대로 읽습니다. 누군가와 숙의할 때, 제 귀에는 아픈 사람이 저를 향해 발하는 절규가 그리 들립니다. 제가 하느님이냐고 물으십니까? 예, 저는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절규하는 이는 그럼 누구냐고 물으십니까? 절규하는 이도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아픈 이에게 하느님이고 아픈 이는 제게 하느님입니다. 무릇 모든 인간에게 그렇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하느님이고, 누군가는 내게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으로서 하느님을 극진히 모시는 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지금 여기 있습니다. 의자로서 매 순간 하느님 나라를 실천하지 못했을 때,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일은 당연합니다. 그날 밤 제가 그 학생에게 어찌해야 하느님 나라를 실천하는 행동이었는지 지금도 분명히 알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참으로 모자람이 있지는 않았을까? 모자람과 맞닿은 헛된 넘침은 없었을까? 어디선가 절규 소리가 계속 들리는 듯도 하니 혹 이게 직업병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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