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숲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주축이다66
물로 걸은 숲
일요일 첫 일과인 빨래를 널며 하늘을 보니 심상치 않다. 이 정도 땡볕이면 경강 지천 걷기는 어렵다. 그래도 본류는 곳곳에 버드나무숲이 있어 그늘을 드리우고 물을 증산해 더위를 피할 수 있다. 잠시 산책이라면 모르되 몇 시간에 걸친 걷기 장소로 지천은 무리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걸어서 가장 빨리 들어갈 수 있는 관악산으로 간다. 기슭을 따라 돌다가 나오기로 한다.
익숙한 바리궁 주산을 가로지르고 살피재 건너 까치 능선을 따라간다. 관악에 본격적으로 들어갈 무렵 홀연히 숲이 물로 다가든다. 그렇다. 강과 바다는 “파란(blue)” 물이고, 숲은 “푸른(green)” 물이다. 풀과 나무가 뿜어내는 곱디고운 푸른 물방울이 온몸을 휘감는다. 날씨 탓인지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 마음껏 두 팔 크게 벌리고 기쁜 소리 지르며 푸른 물길을 따라간다.
숲이 물 되자 나도 이내 물 클러스터 하나 되어 유유히 흘러간다. 물 행성 지구에서 누가 차마 물이 아닐 수 있는가. 땀도 비 오듯 흘러 살갗과 옷을 적시고 소금 결정을 남긴 다음 증발해 다른 순환에 합류한다. 갈증으로 벌컥벌컥 마신 물도 장 바깥을 타고 흐르다 몸으로 스며들며 또 다른 순환에 합류한다. 사소한 데부터 거대한 데까지 이 물 순환은 지구생태계 전제조건이다.
나는 이 평이하고 진부한 숲 걷기에서 찬찬히 작디작은 물과 그 기운을 살핀다. 작은 골짜기 괸 물에 손을 담그고 ‘똘랑똘랑 초르르초르르’ 소리를 듣는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샘 자리와 물길에 주의를 기울인다. 장마 끝나 물길은 끊겼으나 촉촉한 습기 머금은 돌과 이끼를 거룩한 카이로스로 모신다. 생명 간 경계와 생명-비생명 간 경계가 물로써 뭉그러진다. 물이 진리다.
물에 소나타 양식이 있을 리 없으니 나도 목적성과 의미 부여, 엄숙한 마무리를 뺀다. 골짜기, 능선, 숲 이름을 잊는다. 시조창에서 마지막 한마디를 허공에 달아두듯 흔적 없이 일상으로 배어든다. 빈둥빈둥 시간을 길거리에 놓아주고 시적시적 장 보아 집으로 돌아온다. 땀에 절인 몸을 씻는다. 잠자리에 들기 전 맑은 물 한 종지를 모셔둔다. 내일 새벽 이 물이 내 영을 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