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처서다. 여름 뜨거움이 한풀 꺾이고 가을 서늘함이 바투 다가드는 날이다. “처서 지나면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다.”라는 반갑디반가운 말도 있고, “처서 밑에는 까마귀 대가리가 벗어진다.”라는 어마 뜨거운 말도 있듯, 모순이 공존하는 마주 가장자리다.
처서는 24절기 가운데 14번째 날로서 태양 황경(黃經)이 150도가 될 때다. 황경은 황도, 즉 지구에서 보는 태양 이동 경로를 좌표로 나타낸 것이다. 이런 절기가 서구에도 있을까? 이렇게 정교하지는 않고 그저 춘분, 하지, 추분, 동지 정도로 나눌 뿐이다.
절기는 과학인가? 엄밀하게 서구 과학 관지에서 따진다면 “겉보기” 과학, 그러니까 위(pseudo) 과학일 테다. 그러나 동아시아 수천 년 역사는 이 절기를 바탕으로 농경을 일으켜 오늘날까지 고등 문명사회를 가꾸어 왔다. 24절기조차 없는 서구가 과학 운운할 일인가?
서구 과학 역시 민속 과학, 그러니까 민족지 인식론일 뿐이다. 보편 진리로 강요하지만 어림없는 수작이다. 처서 아침 한의원 문을 열다가 나는 명확하게 감지한다. 아, 오늘이 처서 맞구나! 어제까지만 해도 훅 침습하던 열기가 고개를 툭 떨구었기 때문이다.
처서 아침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생각한다. 같은 하늘도 이렇게 달리 볼 수 있는데, 외 눈으로만 세상을 보도록 두드려 패는 제국이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 그 부역자는 또 얼마나 잔혹한 야차인가. 조간신문에 실린 뭔 여사 얘기가 진저리를 몰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