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숲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주축이다67
안양천은 안양을 흐르지 않는다
안양에서 치과 하는 지인이 있어 예약을 잡는다. 치과처럼 사람을 기계 덩어리로 대하는 곳이 없지만 치과적 불편함이 그 모멸감을 이기곤 한다. 11시경 스케일링까지 끝났는데 아무래도 어정뜬 시각이다. 일정을 조금 바꾼다. 일단 범계역으로 가서 4호선을 타고 금정역에서 1호선을 갈아탄다. 석수역에서 내려 가까운 안양천 일대를 둘러본 다음 등산로 입구 먹자골목에서 점심을 먹고 조금 쉬었다가 안양천을 따라 경강 쪽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석수역에서 내려 둔치로 내려간다. 예상보다 “무성”하다. 생태 교란 식물로 지정된 단풍잎돼지풀이 교목이기나 하듯 크게 자라 군락 이루고 있는 풍경이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물가 길에서 물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우거진 풀들은 뙤약볕 아래 걷는 내게 쏠쏠한 위안이 돼준다. 거슬러 올라가다 광명으로 건너가는 작은 다리 위로 올라선다. 제법 싱그러운 소리를 내며 내달리는 물결 아래 커다란 잉어가 떼를 이루어 노닌다. 생명감이 우꾼우꾼한다.
석수역으로 돌아가 근처 음식점에서 살얼음 동동 뜬 열무국수를 들이붓듯 먹은 다음 양산을 손에 쥐고 다시 물가로 나간다. 자전거길에 붙여 만든 산책로 말고 풀숲 한가운데에 만들어 놓은 작은 길을 따라가면서 들꽃과 인사를 나눈다. 여러 번 그랬듯 작은 길옆에는 더 작은 길이 있다. 풀에 뒤덮여 결국은 사라지기도 하지만 작디작은 그 길은 언제나 가슴을 뛰게 만든다. 60년도 썩 지난 깊은 산골 마을 유년기 기억을 불러내기 때문일 테다.
걷다 보니 서울 쪽에도 광명 쪽에도 큰 나무들을 심어놓은 둑길이 눈에 띈다. 뙤약볕을 피할 요량으로 먼저 서울 쪽 길을 걷는다. 맞다. 이 길은 서울 둘레길 구간 가운데 하나다. 전에 서울 둘레길을 걸으며 숲이 아니라 미뤄둔 그 길이다. 이제야 걷게 되는구나. 징검다리를 건너 광명 쪽 둑길로 간다. 대부분 비포장이라 서울 둑길보다 정감 있다. 도림천 꼬마 두물머리를 앞두고는 다시 물가로 내려간다. 물소리와 내음에 싸여 일정을 마무리한다.
안양천은 경강 열한 지천 가운데 세 번째로 크다. 자체 지천만도 스물에 가깝다. 예전에는 대천(大川)이라고도 불렀다니 사실상 강으로 대접한 셈이다. 광교산 기슭 지지대 고개 근처에서 발원해 유역에 여러 고을을 아우른다. 안양이란 이름은 고려 태조가 창건한 안양사라는 절 이름에서 왔다. 안양은 극락정토를 말한다. 그러나 최근 정화·정비하기 전까지 안양천은 오염의 대명사였다. 요즘 들어 깨끗해졌지만 3~4급수다. 안양천은 아직 아프다.
모시려고 기아대교 밑 물에 닿는다. 손 대기가 망설여지는 상태다. 그러나 거기 잉어도 살아가는데, 아니 물 자신이 시난고난 살아가는데, 내가 무슨. 송구한 마음으로 망연히 앉았다가 문득 내가 안양천 언저리에서 제법 오래 살았음을 기억해 낸다.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까지 딸아이가 자란 곳이 바로 동안구 평안동 아니었던가. 안양천이 말 그대로 극락정토 한가운데를 흐르는 생명 물길 되는 그날 오기를 어린아이처럼 꿈꾼다, 두 손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