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용원 Aug 26. 2024

모르니까 살아간다

   

아침마다 숲을 30분 이상 걸어 나와 지하철을 타고 출근한다. 열차 안에 들어와 보면 거미줄이 안경에 구획정리를 해놓기도 하고, 자벌레가 어깨 위에서 이리저리 거리를 재기도 한다. 오늘 아침에는 한참 동안 모르고 오다 문득 보니 손등에 작디작은 새풀빛 곤충이 앉아 있다.  

    

앉은 그대로 데리고 나가 용마산역 가까운 작은 수풀에 놓아주마, 하는 순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아마도 내 손등이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한 듯하다. 내 생각에는 지하철 안이 훨씬 더 위험해 보이지만 그 마음을 전할 길이 없었으니 안타깝지만, 인연은 비껴가고 만 셈이다.   

   

내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으므로 죄책감 거두고 손에서 눈을 뗀다. 다음 순간, 전에 없던 점 하나가 윗옷 자락에서 눈길을 붙든다. 작디작은 고동빛 곤충이다. 이 친구도 숲에서부터 나를 따라왔음이 틀림없다. 아까보다 더 주의해서 데리고 나와 그 작은 수풀에 풀어준다. 잘했을까.  

   

내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으므로 다시 한번 돌아보고 떠난다. 한의원에 앉아서 곰곰 생각한다: 맞다, 틀리다, 하는 작용은 뭘 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대체 내가 저 작디작은 목숨과 삶, 그리고 그 운명에 관해 뭘 알고 있는가? 문득 숭산(崇山) 선사 사여(四如)가 떠오른다.  


    

“우리는 흔히 ‘모른다.’를 ‘알지 못한다.’로 새겨 부정어 취급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디 ‘모른다.’에서 출발해 길을 떠납니다[如如(only don't know)]. ‘모르지 않는다.’라고 부정하면서 ‘안다.’의 세계로 진입합니다[無如]. 아무리 ‘안다.’의 세계를 헤매어도 ‘모른다.’라는 상태가 해소되지 않음을 깨달으면서 ‘안다.’와 ‘모른다.’의 차별이 없는 세계에 다다릅니다[一如]. 결국 ‘모른다.’에 내맡긴 채 걸림 없이 살아갑니다[卽如(only go straight)]. 이렇게 살아감으로써만 실재 세계를 엽니다. 아니 오직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실재 세계 그 자체입니다[卽如是如如].” 


    

2016년 봄, 숭산 사여에 내가 간단히 붙인 풀이(疏)다. 이는 살면서 품었던 의문 하나를 해소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이토록 말도 안 되는 오류와 무지, 심지어 막지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어찌 이토록 태연하고 풍요로운 삶이 허락되는가? 도리어 “막지” 제국이 지구를 지배하는가?   

  

세계는 너무나 곱고 촘촘하다. 인간 지성과 과학으로 낱낱이 그 고운 결에 가 닿지 못하고 일일이 그 촘촘한 겹을 가닥 잡지 못한다. 이 진실을 깨닫고 지성과 과학을 가로질러 갈 때만이 세계 실재가 자욱하게 다가온다. 이 가로지르기 방편이 바로 내가 말하는 범주 인류학이다.     


범주 인류학은 ‘학’이라는 이름을 쓰지만 학문이 아니다. 모르니까 살아간다는 고백을 담은 ‘서사’다. 한의사로 살아가는 내 서사가 그 전형이다. 이른바 과학이 인정하지 않으므로 양의사한테 의사 ‘취급’받지 못하는 내가 “경혈”에 자침해 수만 번을 진료했으니 나는 돌팔이다.      


돌팔이는 모름에도 진료하는 자다. 맞다. 나는 돌팔이다. 그러나 나는 “모름에도”가 아니라 “모르니까” 치료하는 각성한 돌팔이다. 다 아는 자 누구 있어 돌팔이가 아니란 말인가. 과학 운운하는 양의사야말로 참 돌팔이다. 진실 반의반도 못 채우는 과학을 전부라고 우겨대니까.  

작가의 이전글 장난과 장난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