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용원 Aug 24. 2024

장난과 장난 사이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금요일마다 시 한 수를 보내며 안부 전하는 애제자가 어제 보낸 이성복 작 <그 여름의 끝>이다. 나는 웃자고 이렇게 답했다: 내 인생을 놓고 장난치는 절망에게 도로 장난을 걸면 이기는군하~ 하아! 보낸 직후 내 기억을 타고 초르르 지나가는 필름 하나 있었다.      


커다란 포식동물이 먹잇감을 잡아 놓고 장난치는 광경이다. 사냥 기술을 연마하는 과정이기도 하다지만 먹잇감 처지에서 보면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놀이다. 필사적으로 달아나려고 할수록 절망은 깊어진다. 살아 나갈 길은 단 하나다. 뒤집어 장난을 치는 거다. 그래, 죽어주마, 하고 힘 턱 뺀 채 축 늘어진다. 어? 죽었네, 에이~ 하고 흥미를 잃어 눈길 돌리면 그 틈에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난다. 냉혹한 장난을 이기는 냉철한 장난인 셈이다.      


어찌 보면 이 이야기는 ‘지는 자세로써 이기는 법을 배운다’라는 우치다 타츠루 무도 원리와 맥락이 닿아 있다. 그에 따르면 제자가 스승과 수련할 때 제자는 이기는 법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제자는 스승이 거는 기술에 완벽히 몸을 맡겨 지기를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이기는 스승의 몸이 제자에게 홀연히 배어든다. 대략 이런 말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지나치게 진지 절거나 엄숙 떨면 정신 근육에 힘이 들어가 뻣뻣해지기 마련이다. 안다면서도 문제를 어렵게 느낄수록 뻣뻣해지는 쪽으로 기운다. 직면한다는 말을 오해해서 그렇다. 직면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해결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목적의식이나 예기불안을 안고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실제로 뻣뻣해지는 사람은 문제 아닌 문제 앞이나 뒤에 시선을 배치한다. 그러면 문제 실재가 왜곡된다; 대부분 증강된다; 너무 크거나 아뜩해 보인다. 그래서 문제에 휘말리거나 휩싸이고 만다.   

  

직면은 문제 자체를 평가·해석 없이 말갛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말갛게 보면 있는 그대로 보인다. 있는 그대로 보면 문제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틈-반드시 있다-을 발견한다. 틈은 나를 휘말리거나 휩싸이지 않도록 살며시 잡아준다. 바로 이때 진지와 엄숙, 그 부푼 자루가 훅 까부라진다. 바로 이때 장난기=놀이 감각=유머가 발동한다. 역설을 창조하는 순간이다.  

    

나더러 죽으라는 거지? 난 안 죽어, 하면 문제와 내가 엉겨 붙은 거다; 그래 죽어줄게, 하면 문제와 나 사이 틈을 보고 장난이 터져 나온 거다. 나더러 절망하라는 거지? 난 절망 안 해, 하면 문제와 내가 엉겨 붙은 거다; 그래 절망해 줄게, 하면 문제와 나 사이 틈을 보고 장난이 터져 나온 거다. 이 장난, 그러니까 놀이는 감동·감화하는 두 길을 연다. 하나는 골계다. 골계는 하늘빛 웃음을 몰고 온다. 다른 하나는 숭고다. 숭고는 물빛 울음을 몰고 온다. 둘 다 장엄에 가 닿는 질탕하고 거룩한 노래다. 장난 없는 팍팍한 삶은 장난 아니다.  

   


작가의 이전글 아기는 왜 길을 잃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