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사석에서는 물론 공식 석상에서도 일본인을 반드시 “왜놈”이라 부르는 교수가 있었다. 사시 출제위원도 하고 실력도 좋고 인품도 뛰어난 분인데 희한하게 극 졸강(拙講)이었다. 그런데 “왜놈” 이야기만 나오면 펄펄 날아다녔다. 필경 깊은 곡절이 있을 테지만 누구도 자세히 묻지 않았다. 나는 강의 아닌 “왜놈” 얘기를 들으러 가곤 했다.
문득 그 교수가 생각난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중랑구청에서 의료봉사를 하는 한의대 제자들을 만나러 이동하다가 상봉역을 들르게 됐다. 무심코 역명판을 보니 상봉을 일본어 サンボン[산본]이라고 표기해 놓았다. 일본 사람은 ㅇ 받침 발음과 ㄴ 받침 발음이 구분이 안 되는구나, 하는 순간 번개같이 그러면 산본역은 어떻게 표기했을까, 호기심이 일었다. 물론 엄밀하게는 호기심이라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심리라 해야 맞다. 아니나 다를까, 똑같이 サンボン[산본]이라고 적어 놓은 사실을 인터넷으로 확인했다. 바로 그 순간 “왜놈” 교수 얼굴이 떠올랐던 거다. 왤까?
생각하는 짧은 동안 떠오른 또 한 얼굴, 그 분에게 답이 있다. 박경리 선생. 선생은 날카롭고 가차 없는 일본 비판으로 뜨르르하셨는데, 가장 들어맞는 표현이 “문명을 가장한 야만(civilized savages)”이었다. 옳거니. 바로 그거다. 말도 말이지만 문자야말로 야만 그 자체다. 한자 일부를 떼어다가 만든 짝퉁 “쪼가리” 문자가 드러내는 우스꽝스러운 풍경은 저들이 빚은 그럴싸한 문명을 송두리째 희화화해 버린다. 예컨대 저들이 만화에 몰입한 배경에는 바로 이 야만 문자가 품은 허기증이 도사리고 있으니 말이다.
저들 말글살이 야만성은 저들 짝퉁 문명 총체를 야만성에 가두는 감옥이다. 짝퉁 문명은 도저한 열등감을 낳아 긴 세월 동안 키워내 오늘에 이른다. 백제에서 조선까지 저들이 쟁여 온 열등감은 거대한 투사(projection), 좀 더 명확하게는 전가(轉嫁)로 증강되어 왜구 노략질-왜란-병탄으로 이어지는 침략 범행을 저지르도록 만들었다. 7~8세기 건너가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한 백제계 집단무의식, 은닉한 증오와 복수심이 음산한 추동력으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불법 통치 시대 한글 간략화, 정확히는 형해화를 획책해 오늘까지 비가역적 음영을 드리우게 한 짓, 6·25전쟁 때 참전과 더불어 한반도 영구 지배를 미국에 요구한 짓,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협잡을 마다하지 않는 짓도 모두 여기서 나왔다.
대부분 여기까지만 들어도 이게 무슨 말이고 할 테지만 야만 본진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백제계 집단이 표적으로 삼아야 할 정확한 대상은 자신을 패망시킨 신라 매판 집단( 후예)인데 엉뚱한 데 조준하고 살육극을 자행했다는 사실이 그 핵심이다.
648년 신라 김춘추(나중에 무열왕)는 당 이세민(나중에 태종)하고 밀약을 맺는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주면 대동강 이북 땅을 내주겠다는 내용이다. 우리 역사 최초 매판 늑약이다. 그 늑약이 빚어낸 전쟁에서 패배해 왜로 망명한 백제계 집단이 간직한 원한 맺힌 향수가 장구한 세월 쟁여져 반도 정복 무의식으로 자라났다. 그러나 자기 내부만 들여다보느라 상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고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피지 않은 결과 저들 야만은 더 깊은 굴을 파고 들어앉아 버렸다.
가짜 통일 이후 신라는 지리멸렬하다가 고구려 계승을 내건 고려에 국권을 내준다. 고려가 그리는 고구려 꿈은 김부식이란 아이콘으로 대표되는 신라계 집단한테 먹히고 만다. 신라계가 말아먹은 고려를 대신해 백제계 조선이 선다. 조선 또한 이완용이란 아이콘으로 대표되는 신라계 집단(서인 노론)한테 먹혀 결국 일제에 바쳐진다. 이 과정을 들여다보면 백제계 지배층 반도 정복 야욕이 자기를 파멸시킨 신라계 매판 집단과 야합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결과는 백제계, 고구려계 “동족”을 수탈·살해하는 참극으로 나타났다. 자기가 쏴 죽인 독립군, 731부대로 잡아가 생체 실험한 불령선인, 관동 대지진 때 죽창으로 찔러 죽인 ‘조센진’, 그리고 무엇보다 차마 입에 올릴 수조차 없이 참담한 “제국의 위안부”가 대부분 제 “동족”인 줄 여태도 모른 채 미쳐서 날뛴다. 신라계 매판 특권층 뉴라이트 집단이 제3의 매판 늑약이라도 해주길 채근하며 “적과의 동침”에 설레고 자빠졌다. 야만도 이런 야만이 없다.
이런 야만 “왜놈”을 흠숭해마지않는 토착 “왜놈”이 권력을 잡자 대놓고 나라를 망가뜨려 야만 “왜놈” 투사 전략에 적극 능동 부역하다 못해 심지어 떨려나는 기시다 ‘쫑파’까지 해주는 요즘, 그 교수나 박경리 선생 같은 일급 지식인은 눈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또 국권 빼앗기는 꼴을 보고야 말 텐가. 야만에 창아리 내주고 누리는 부귀영화가 그리도 자랑스러운가.
★ 제목 중 산고는 박경리 선생 <일본 산고>에 바치는 오마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