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이 가벼운 내 권리

-숙의의학 소설-

by 강용원


예순 넘기며 잘 살아온 전업주부인 내게 문제 생길 일이 뭐가 있겠나. 다만, 이곳저곳 아픈 데가 좀 있어서 오늘은 침이나 맞을까 하고 동네 한의원을 찾았다. 문진 과정에서 나는 마음 문제를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마음 치료 전문이라는 원장 선생 또한 동네 노인들에게 마음 문제를 일부러 먼저 꺼내지는 않는다고 했다. 침 치료하는 동안 불가피한 경우에만 언급한다고 했다. 침 치료가 끝나고 돌아가기 직전, 나는 나도 모르게 갑자기 원장 선생과 잠시 면담이 가능한지 간호사에게 물어봤다. 원장 선생 앞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나도 모르게 서두르듯 말했다.


“저···제가요, 아무래도 우울증 같습니다.”


원장 선생이 물었다.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내가 대답했다.


“사는 게 즐겁지 않아요.”


원장 선생은 내게 다소 어려운 설명을 건넸다.


“우울증은 꿀꿀한 정서가 깊어진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생각이 일상적 삶을 무너뜨릴 때, 확인되는 자기부정을 의미합니다.”


나는 단호히 말했다.


“일상을 사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어요.”


원장 선생은 내게 도발을 포함하는 질문을 던졌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우울증은 없습니다. 전혀 문제없는 일상적 삶이란 어떤 것인가요?”


나는 자부심을 가지고 내 지난 삶을 단계별로 정리했다. 어려서는 어머니 뜻에 맞추어 공부 잘해서 원하는 대학 갔다. 결혼해서는 남편 뜻에 맞추어 화목을 이루며 잘 살아냈다. 부모가 되고서는 아이들 뜻에 맞추어 잘 양육했다. 나 자신이 짊어진 의무를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한 적 없었다. 지금 경제적으로도 풍족하다.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원장 선생은 가차 없이 잘라 말했다.


“바로 그게 무너진 삶입니다.”


나는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짊어진 의무 말고 거머쥔 권리도 있다는 사실이 전혀 증명되지 않은 삶 그 자체가 우울증이라는 설명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권리를 보전해주지 못한다는 말에는 잠시 갸웃했지만 이내 수긍했다. 내 삶 주체성을 복원하기 위한 전사로 서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각기 그들이 짊어져야 할 몫을 넘겨주고 내 권리를 거머쥔 삶으로 이동하는 이치를 간단하게 덧붙여 설명해주었을 때 나는 뭔가가 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남편이 치료받아야 하겠네요.”


구태여 따진다면 내 남편도 치료가 필요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내 삶을 바꾸는 이야기를 하는 시점에서 나는 왜 다른 사람을 떠올렸을까? 내 속을 나도 몰라 당황해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기라도 한 듯, 원장 선생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자신을 가볍게 여길 뿐만 아니라 자신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에 생긴 병조차 가볍게 여깁니다. 자기 병을 치료하기 위해 드는 돈과 시간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재빨리 다른 사람이 지닌 무거운 문제 쪽으로 예의 그 의무감을 발동시킵니다. 자신보다 남편, 아이들 문제가 더 무겁다고 판단하며 살아온 평생 습관이 그를 그렇게 만듭니다. 우울증 환자들이 이만하면 됐다거나 더는 안 된다는 핑계를 대며 서둘러 치료를 중단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 인생과 병을 육중하게 여겨야 즐거운 삶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 뒤 내가 그 한의원에 다시 가지 않은 이유는 우리 집 강아지가 더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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