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의의학 소설-
예술적 감수성을 보존하려 정신적 상처와 고통을 그대로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ㅇㅎ가 찾아왔습니다. 타고난 부분도 있겠지만, 성장 과정에서 가족에게 당한 참혹한 공격을 견디면서 생겨난 고통 감수성을 그는 자기 예술적 영감 자양분이 되도록 했습니다. 서둘러 기계적으로 약물을 통해 치료받기를 삼가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런 자기 생각을 수용해주는 제게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이 당한 폭력을 치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부모에게서 유기되었는지 그 과정을 극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자기 예술관을 피력하면서 그 계통 기득권세력이 무슨 짓을 그에게 저질렀는지 울분을 토하며 전해주었습니다.
당연히 그에게는 궁핍이 천형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쥐꼬리만 한 강사료로는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그냥 오라 했더니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다며 잠시 중단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가족 도움은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안타깝지만 저로서도 더는 강권하지 못하고 숙의는 중단되었습니다.
그의 성향으로 미루어 나중에 대박 나는 성공을 거두었으리라 예상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로서는, 그가 지금 자기 정신적 고통을 어찌 대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궁금합니다. 그때 그야말로 악전고투하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심신이 모두 피폐한 상태였습니다. 인상이 날카롭다 못해 귀기가 스치기까지 했습니다. 영양이나 소화 상태도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쓰디쓴 체취를 풍겼습니다. 여전히 그는 그 어둠 속에서 뮤즈를 만나고 있을까요?
우울장애, 양극성장애 같은 정신장애가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 원천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하는 풍조는 진실 여부와 무관하게 여전히 강합니다. 유럽은 한때 일부러 우울장애에 걸리거나 우울장애 환자인 척하는 유행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오죽하겠습니까. 예술이 예술가 병증을 정확히 드러내는 치유 과정 일부라는 측면이 존재하는 한 불가피한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 모차르트, 고흐, 버지니아 울프···뜨르르한 증인(!)까지 있으니 아무래도 이 문제를 의학적으로 간단히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최근 서구에서 양극성장애-정확히는 조증(mania) 상태-와 종교적 엑스터시의 상관관계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적 엑스터시와 예술적 감성 고양이 다르지 않을 테니 결국 같은 문제의식이라 하겠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뇌 과학적 탐색이 핵심을 이룰 듯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그 작업만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더 큰 지평이 있습니다.
인간 정신 전체 지평에서 볼 때 예술적 감성 고양 상태와 양극성장애 조증 상태 뿌리가 전혀 다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쏠림 또는 과잉이 어떤 방향으로 내달리느냐에 있습니다. 방향은 각자 지닌 생명 에너지 전체 맥락과 구체적 역관계가 상호작용하여 결정합니다. 생애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경향성, 경향성에 영향을 끼친 인간관계, 인간관계가 빚은 상처, 상처의 출구, 출구를 대하는 사회적 시선들이 어우러져 다른 길을 갑니다. 마침내는 사회문화적 인식차가 예술가를 정신장애자로, 정신장애자를 예술가로 만들기도 한다는 진실 앞에서 우리는 진중해져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 뮤즈를 만나는 삶은 행복하고 양극성장애 조증을 겪는 삶은 불행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두 경우 모두, 겪는 동안과 그 전후에 어떤 고통을 통과한다는 점에서 같기 때문입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과 소통 불가능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겸허히 기다려야 합니다. 유난히 형형했던 그 청년 눈빛이 기억에 선명한데 중년으로 살아가는 지금은 어떨까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