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용원 Sep 13. 2024

다정불심3-진각다정원시병(儘覺多情原是病)


이화월백삼경천(梨花月白三更天) 

제혈성성원두견(啼血聲聲怨杜鵑)

진각다정원시병(儘覺多情原是病)

불관인사불성면(不關人事不成眠)

     

배꽃으로 달 밝힌 깊디깊은 밤

두견새 피 울음 내 원망이리

살가움이 병 되는 사무친 깨침 

인간사 무심해도 잠 못 이루네    

 

★ 자하 신위 (紫霞 申緯)가 이조년의 아래 시조를 한역하고 그 한역시를  우리가 번역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ㅇㄹㅇ가 왔다. 앞으로 읽어도 ㅇㄹㅇ 뒤로 읽어도 ㅇㄹㅇ가 이상한 변호사 ㅇㅇㅇ처럼 불쑥 나타났다. 불쑥 와야 반갑죠, 아버지! 그렇다. ㅇㄹㅇ는 내 딸이다. 낳아주어서가 아니라 죽기 직전에 세 번이나 살려내어서 나는 아비다. 물론 ㅇㄹㅇ 기억에서는 사라졌을 테다. 기억하지 못해서 더욱 애틋하다. 애틋함은 언제나 그 고운 목소리를 타고 낭창거리는 슬픔으로 온다.  

    

ㅇㄹㅇ는 똑 아픈 사람 어조를 지녔다. 웃으며 말해도 아픔에 겨운 선율이 흘러나온다. 손짓도 거의 없다. 말하는 일, 아니 그 전에 사는 일 자체가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은 어떻게 바꾸어도 모두 같은 이미지로 번역된다. 하다못해 담벼락에라도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좌우명을 지닌 사람처럼 한껏 몸을 움츠린 채 사부자기 다가들어 나직나직 도란댄다.  

    

내 앞에서 펼쳐내는 이런 모습만으로는 그가 불같이 화를 내는 장면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남편에게도 딸에게도 제풀에 기절할 정도로 화를 낸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사람이 이토록 다른 풍경을 그려내는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십수 년째 풀지 못한다. 나는 안다. 그 분노가 두려움에서 오고, 두려움은 “심각한” 살가움에서 온다는 진실을.   

   

“심각한” 살가움은 정확히 말하면 “병인 또는 병으로서” 살가움이다. 이 정도 살가움은 마치 화상 입어 한 겹 벗겨낸 피부와도 같다. 지극히 사소한 침습조차 견디지 못한다. 살가움에 지극히 사소한 침습은 살천스러움이 아니라 둔함이다. 따스하고 부드럽고 상냥한 마음결을 상대가 뚱하고 멍하게 지나칠 때 살가움은 관통상을 입는다. 죽음 냄새가 가차 없이 스며든다. 

    

한가위 인사차 와서는 또 한참을 도란대던 ㅇㄹㅇ가 떠나기 전 나는 말해주었다: 아가, 네가 여전히 아픔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까닭은 너무 진지하기 때문이다. 지나친 진지함은 곧장 심각함, 그러니까 질병 상태로 넘어간다. 네 살가움은 언제든 그 선을 넘어갈 준비가 돼 있어서 위험하다. 맨살 드러낸 살가움은 널 죽일 수도 있고 상대를 병들게 할 수도 있다.  

작가의 이전글 다정불심2- 의연법(擬然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