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으로서 우리가 자기 삶을 돌아볼 때 흔히 쓰는 말을 박노해는 이렇게 표현한다: 길 잃은 날엔 자기 안의 소년 소녀로 돌아가길. (『눈물꽃 소년』)
자기 안의 아이는 인생 지혜가 발원한 동심(childlikeness)을 가리킨다. 동심은 물론 아이다움을 밝음 속에서 드러낸 표현이다. 아이에게는 어둠도 존재한다. 우리는 이를 치기(childishness)라고 부른다. 치기에서 인생 탐욕이 생육한다. 아이일 땐 이 둘이 뒤엉켜 있어 떼어낼 수 없다. 성장 과정에서 알맞은 분리가 일어나면 치기는 아름답게 사라진다, 마치 가을날 단풍낙엽처럼. 성장 과정에서 상처를 입거나, 너무 더디 자라면 치기는 질척거리며 평생 따라다닌다. 마치 여름날 폭풍에 꺾인 가지 나뭇잎처럼. (이 비유는 트리스탄 굴리 『나무를 읽는 법』에서 왔다.)
실제로 우리가 겪는 숱한 마음 병은 공생 지혜를 일으키는 동심을 간직하고 약육강식 지식을 부추기는 치기를 걷어내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생긴다.
삶은 일이기도 하고 놀이기도 하다; 투쟁이기도 하고 축제기도 하다; 사업이기도 하고 시(詩)이기도 하다; 현실이기도 하고 마법이기도 하다. 이런 표현은 어른 어법이다. 아이 어법으로 말한다면 이렇다: 삶은 일도 놀이다; 투쟁도 축제다; 사업도 시다; 현실도 마법이다. 아이는 그래야 한다. 시공이 쌓이고 넓어지면서 혼융에서 화쟁으로 자라고 마침내 무애(無碍) 자재, 어른으로 살아간다. 너무 일찍/과하게 어른이 되면 놀이, 축제, 예술, 마법을 잃어버린다: 자기부정 증후군. 끝내/조금밖에 어른이 되지 못하면 놀이, 축제, 시, 마법에 사로잡힌다: 자기중심 증후군.
웃자란 아이는 동심이 상해서 예를 들면 우울장애에 걸린다. 늦자란 또는 자라지 못한 아이는 치기가 성해서 예를 들면 반사회적 인격장애에 걸린다.
사회는 이런 두 부류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회적 강자여서 생물학적 강자인 후자는 사회적 약자여서 생물학적 약자인 전자를 사냥한다. 목하 우리 사회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탑재한” 일제 특권층 부역 집단 지배층이 대놓고 함부로 우울장애 “뒤집어씌운” 피지배층을 몰아 죽이는 사냥터다. 이태원 거리가 거기더니 이제는 병원 응급실이 거기다. 의도적 무지를 자랑하는 떨거지는 말할 것도 없지만 그나마 투표권 행사에 신경깨나 쓰는 시민도 상황을 드문드문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참으로 위태로운 사회다. 기막히게 어이없는 나라다.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