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숲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주축이다73
나아가지 않고 되돌아오는 물 걷기-모래내 애가
북한산 평창동 쪽 기슭에서 발원한 홍제천은 본디 평창동, 홍은동, 홍제동, 연희동, 연남동, 남가좌동, 서교동, 성산동, 망원동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이었는데 현재는 사천교부터 성산대교 북단 성산지하차도 근방에서 불광천-본디 이름 연신내-과 만나기까지 직강화되어 있다. 사천교 부근에서 만나는 세교천-본디 이름 잔다리내-을 지천으로 거느린다. 세교천은 와우산-홍대 뒷산-에서 발원한다. 세교천과 직강화 이전 홍제천 구간은 완전히 복개된 상태다.
홍제천은 본디 우리말로 모래내였다. 공문서 짓는 벼슬아치들은 한자를 쓸 수밖에 없었으니, 홍제원을 지난다 해서 그리 이름을 붙였다. 억지 음차를 한 경우도 수두룩하다. 모래내를 끼고 있는 마을 이름이었던 가재울을 가좌동으로 바꾼 짓이 그 대표 사례다. 어디 이름뿐인가. 본디 모래내는 사천교-이 또한 본디 이름이 모래내 다리였다- 지점부터 말하면 월드컵북로12길-월드컵북로-성미산로-월드컵북로23길로 이어지는 북쪽 어름과 성미산로15길-성미산로16길-월드컵북로8길-월드컵북로7길-월드컵로16길-월드컵로15길-월드컵로11길-희우정로10길로 이어지는 남쪽 어름을 아우르며 굽이쳐 흐르는 넓은 내였다. 마포구청역 쪽으로 직강을 만들어 오늘날 홍제천 좁고 짧은 하류가 되었다. 물론 이 또한 식민지 시절 왜놈들이 벌인 짓이다.
모래내를 어떻게 걸을까? 지하철역을 동선 결절점으로 삼으며 궁리한다. 아무래도 구간을 나누어야겠다. 일단 상류 쪽은 홍제역에서 출발해 북한산 자락길을 걸은 다음 옥천암부터 모래내를 따라 내려오기로 한다. 하류 쪽이 문제다. 땅속에 묻혔다고 직강화 이전 옛 물길을 무시할 수는 없다. 가좌역 근처 모래내 다리에서 모래내 남쪽 경계를 따라 내려갔다가 북쪽 경계를 따라 올라온 다음 직강화된 물을 따라 다시 내려가 마포구청역에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상류 쪽은 워낙 익숙해 정말 별 새로운 생각 없이 걸었다. 북한산, 백악산, 인왕산, 백련산, 안산(고은산)에 둘러싸인 주위 지형이 물길을 휘돌게 해 걷는 재미가 다른 지천에 비해 훨씬 쏠쏠하긴 하다. 대신 유역이 좁아 둔치나 습지형 숲은 조촐하다. 홍은사거리에는 복개 상태로 흐르는 물 악취를 맡으며 걸어야 하는 제법 긴 구간이 있다. 멀리 내다보지 않고 마구잡이 토건 벌여 온 현대사를 압축해서 본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태평히도 걷는다. 악취 때문에 더욱 빨리 걷는 분위기가 아님은 분명하다. 물론 그나마도 물이 있어 좋다는 너른 마음들도 아닐 테고. 하여튼 매우 묘한 인상을 떨치지 못하고 서둘러 지난다. 거기를 벗어나 한참 걸어도 나중에 홍제천 상류 떠올리면 거기부터 기억날 듯해 개운찮다.
하류 쪽은 가좌역을 나와 성미산로15길에서 출발한다. 잠시 걷다가 이 길은 물가를 따라가고 서쪽 골목 두엇은 물을 따라가는 셈이니 그리로 옮아간다. 또 잠시 걷다가 복개 상황이 아니라면 어차피 물가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하고 다시 성미산로15길로 나간다. 이렇게 노닐면서 희우정로10길에 다다른다. 동남쪽은 언덕이니 필경 서남쪽으로 휘어져 한강에 닿았으리라 추정하고 북쪽 경계를 따라 월드컵북로23길부터 타고 올라간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골목을 들락거린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여유는 지도 읽는 힘에서 나왔다. 실은 홍제천 자료에 오류가 많아서 순전히 지도만 보고 내가 모래내 옛 물길을 추정해 자료 내용을 수정하고 물길 중심을 잡았다. 물길 중심은 골목이 자연스럽게 구불거리는가, 여부를 보고 판단했다. 사뭇 정확했다.
물이었을 골목을 걷다가 복개 아니었으면 걸을 수 없었을 길이라는 생각에 문득 멈춰 선다. 그 생각이 몰고 오는 역설 감각에 잠시 주의를 기울인다. 후미진 곳에서 더욱 앙칼지게 드러나는 식민지 풍경이 다시없이 아프고 슬프지만 바로 여기서 내 각성이 벼려지고 단련되니 감사 또한 갖추어야 할 예의가 아니겠나. 처음 지점으로 돌아와 잔다리내 흔적 따라 조금 걸은 뒤 이내 직강화된 물을 따라 내려와 졸지에 지천이 돼버린 연신내에 사과하고 발길을 거둬들인다.
이로써 경강(京江) 지천 걷기를 일단 끝낸다. 일단이라고 말한 까닭은 실제 지천이 더 있는데 그만하기로 해서다. 만초천으로 표기한 넝쿨내, 아현천으로 표기한 애오개내, 그리고 봉원천으로 표기한 창천 또는 녹계천, 그러니까 푸르내-전해오는 기록이 없어 만들어 낸 용어-, 이렇게 셋이다. 이 셋은 전체가 복개되어 도로 밑에 있다. 아마도 말랐거나 하수로 흘러가리라. 모두 왜놈 짓이다. 애오개내는 푸르내와 지하로 연결해 하나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찾을 수 없다. 넝쿨내는 서울역 뒤를 지나는 하천이라 식민지 물류 역사를 따라 끄트머리 한 지점만 남기고 모조리 덮혔다. 이 매장된 물길을 걸어 애도해야 마땅하지만, 마음 우꾼하는 어느날을 삼가 남겨두고 오늘 모래내 애가 헌정으로 “일단” 그에 갈음한다. 한강을 걸은 지 여섯 달 만이다.
표고 200미터 이상 서울 산 스물일곱, 한강 양평에서 김포까지, 한강 지천 아홉, 지난 3년 반 동안 걸은 숲과 물이다. 200미터 이하 산, 지천 속 지천, 또 그 속 지천을 보태 천장관절에 염증 생길 만큼 빙의되어 걸었다. 사람으로서 나무로서 물로서 먼지로서 내 본성을 확인하고 감사하고 속죄하고 회심하여 반제국주의 전사로 살아가는 근원을 톺았다. 최후 두 달 멈추었다 되돌아오는 걷기는 전 과정을 성찰한 메타 걷기며 묵시였다. 하여 아직도 낮게 엎드린 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