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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편’

by 강용원

숙의 치유하다가도 불쑥, 침 치료하다가도 불쑥, 윤석열 석방 스트레스가 치밀고 올라와 “빡치다가” 진료 시간 끝나기 무섭게 광화문으로 달려간다. 아직 본 집회가 열리기 전인데 깃발은 파도를 이루고 시민 흐름은 은하수를 이룬다. 얼마 뒤 안국동 집회 쪽에서 합류하는 행진이 다가오면서 장관을 연출한다. 경찰 출입 통제선을 평화롭고 자연스럽게 밀어버리니 광장은 더욱 드넓어진다. 풍물이 흥을 돋우고 명망 정치인 등장이 환호를 자아낸다.

나는 언제나처럼 흥미로운 깃발 구경하며, 노래에 맞춰 몸을 들썩이며, 구호를 소심하게 따라 하며 변방을 지킨다. 이런 식으로 거리에 선 지 40년인데 단 한 번도 무슨 조직에 속한 적이 없어 변방이야말로 똑 알맞은 내 자리다. 내 자리 바로 바깥 공간엔 구경꾼, 행인, 심지어 ‘태극기부대’ 사람들이 혼재한다. 구경꾼 표정은 절묘하다. 관심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무관심을 가장한 어떤 두려움이 내 자리까지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들을 가로막는다.

누군가 함께 하자며 손을 잡아주면 그들은 곧바로 변방으로나마 들어올 테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단서도 표지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사람 눈빛을 아주 잘 안다. 내가 그런 눈빛으로 오랫동안 살아와서다. 그 눈빛을 한 사람들을 내 눈빛으로 어루만지며 나는 천천히 변방을 따라 걷는다. 혹시 그들이 내 눈빛을 보고 쭈뼛거리면서라도 작디작은 단서나 표지 지닐 용기를 낼 수 있을까 하면서.

이 집회 참여하면서 발견해 매주 가는 음식점으로 향한다. 여느 때보다 사람이 많다. 나를 알아본 주인장이 4인용 테이블에 붙어 있는 2인용 테이블을 조금 떼어놓아 내 자리를 마련해준다. 천천히 식사하며 집회에서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는데 옆자리 앉은 남자 사람 눈길이 나를 향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 앞에 앉은 여자 사람이 속삭인다: 우리 편이셔! 나는 속으로 웃으면서도 우정 아는 체하지 않는다. 잠시 뒤 그들과 닿을 길이 자연히 열린다.

내가 먹는 생선 맑은탕을 보더니 여자 사람이 말한다: 여보, 저분 드시는 거 맛있게 생겼다. 근데 2인분 이상이라 쓰였네. 더 시키긴 부담스럽고. 나는 가볍게 말을 건넨다: 이 집은 1인분도 줍니다. 그들은 좋아라, 하며 얼른 주문한다. 그들은 인천에서 매주 올라온단다. 내가 웃으며 묻는다: 어떻게 ‘우리 편’인 줄 아셨습니까? 남편이 답한다: 어르신 핸드폰에 달린 노란 리본 보고 알았습니다. ‘우리 편’이란 아이 식 표현이 새삼스레 살갑고 정답다.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윤석열을 풀어준 검찰총장 심우정이가 심대평이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만다. 심대평은 정석모-비서실장 정진석이 아비-를 거쳐 김종필로 연결된다. 김종필 일가는 대표 친일매국 가문이다. 결국 뒤를 파보면 ‘우리 편’ 아닌 자들은 모조리 특권층 부역 집단 일원이다. 저들은 이미 몇 대에 걸쳐 그렇게 서로 엮어 지배층을 형성했다. 이번 내란에 윤석열 아비 윤기중 충청도 인맥이 총동원된 듯하다. 정말 무섭고도 분한 일이다.


지하철에서 내린 다음 10분여 숲길을 걸어 집으로 간다. 인적이 끊긴 어느 지점부터 나는 끅끅거리며 울기 시작한다. 항일 무장 투쟁하던 증조부가 전투 중 왜놈 총에 맞아 돌아가신 뒤 멸문에 이른 우리 집안 곡절을 떠올리며 나는 형언할 수 없는 통증으로 가슴을 친다. ‘우리 편’ 아닌 놈들은 저리도 기탄없이 살아가는데 ‘우리 편’은 왜 여전히 거리로 나아가 스스로 증명하지 않으면 죄책감에 시달리는 삶을 살아가는가. 이 모멸을 어째야 하는가.

시침 떼고 들어가 옆지기와 맥주 한잔하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다. 딸아이 얘기를 하다가 돌연 벽과 부딪친다. 자식에게 금수저 물려준 윤기중이나 심대평이 같은 아비가 아닌 사실에 감사하다가도 그 감사가 내 딸아이 감사를 자동으로 포함하지는 않는다는 진실 앞에서 속수무책이 된다. ‘우리 편’ 중에도 자식 끌끌하게 키워낸 아비들을 떠올리며 부끄러워하기에 나는 이미 늙은이다. 떼 둔 시침을 다시 끌어안고 자리에 눕자 눈물이 또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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