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보조 이야기324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by 강용원

숲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주축이다91



정릉 숲이 예술 본성을 깨우다


요즘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는 일요일 아침이 계속된다. 오늘도 아무 생각이 없다. 그냥 지하철역으로 간다. 갈아탈지 말지를 결정하는 두 정류장 안에서 대강 그림이 나온다. 아무리 해도 망설여질 때 가장 편한 곳이 정릉이다. 정릉은 두 번째 고향이다. 지난 육십 년 동안 우울증이 들이닥칠 때, 그리움이 사무칠 때, 계절이 공중제비 돌 때, 심지어 까닭이 없을 때도 찾아오곤, 아니 되돌아오곤 했다. 유서 깊은 능이라는 인식 이전에 고향 풍경을 불러내는 숲이라는 인지가 선도해 온 습관이지 싶다. 익숙한 이상으로 새로운 풍경을 언제나 준비해 두었다가 꺼내놓는 이 아리잠직한 공간은 경이롭게도 덜어주는 힘과 더해주는 힘을 모두 지녔다. 적어도 내겐 말이다.


오늘도 정릉 숲은 본성 따라 흐르는 일정에 맞추어 꽃들이 피고 지며 연두 스펙트럼이 결 지고 있다. 전경은 물론 곱고 촘촘하게 펼쳐지는 작은 풍경에 주의를 기울이며 천천히 걷는다. 미학과 예술을 창조한 자연 속에서 마치 처음인 듯 정색하고 미감을 자각한다. 그렇게 자각된 미감을 스마트폰 사진일망정 곡진히 표현한다. 비록 직업 예술가는 아니지만 내 미감을 내 고유 관지(觀地)에서 드러내는 한 내 행동은 분명 예술 행동이다. 예술 행동은 문명 차원에서 획득한 부가 능력이기 이전에 생명을 지탱하고 발양(發揚)하는 근본 능력이다. 예술에서 치유와 저항을 빼놓을 수 없다는 진실이 그 증거다. 사진을 다듬으면서 예술인 인생, 인생인 예술을 화두 삼는다.



느닷없어 보이는 예술 이야기는 가족 단톡방에 보낸 사진을 보고 딸이 보인 반응에서 비롯한다. 시기상 거의 마지막이랄 수 있는 진달래를 찍은 사진인데 딸이 예사롭지 않다고 한다. 물론 한번 웃고 흘려보낼 만한 에피소드다. 나는 그 순간 문득 멈춰 선다: 예술 행동이라고 이름하지 않았을 뿐 나는 이미 예술 생애 속으로 들어와 있었던 게 아닐까? 아니다. 내 생애 자체가 이미 예술로서 영위된 게 아닐까? 아니다. 나만이 아니라 인간 모두가 그런 게 아닐까? 그렇다. 우리 자신이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미감이 접히고 구겨진, 심지어 수탈된 탓이다. 번성/진보/성장 주술을 걸어 인류를 말살 정복전으로 내몬 제국주의, 그 총아인 자본주의가 꾸민 음모 결과다.


제국주의는 자연에서 예술을 떼어내 극단 기술로 천착했다; 고상하고 고급스러운 특권 영역으로 추켜세웠다. 제국 예술 주인은 제국 지배층이고 실제 창작 주체인 직업 예술가 집단은 그 마름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난 근대 이후는 그렇지 않은 듯 보이지만 기본 구도는 변함이 없다. 반제 기치를 세운 예술가가 없지 않으나 시장과 절연하지 않는 한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특히 여전히 식민지 실재를 벗어나지 못한 절대다수 국가에서 예술은 철저하고 처절하게 왜곡된 채로 부유한다. 본디 예술성을 회복하려면 모든 예술은 반제 전선 선봉에 서야 한다. 반제 전쟁 본진은 자연, 그 숲이며 물이며 대기다. 인간 천착 조증 예술은 해독해야만 한다.


정릉 숲이 깨운 예술 본성을 극진히 품고 나는 새로운 되작거리기로 나아간다. 참으로 오랫동안 소중히 여겨왔으나 요 이삼 년 어떤 며리에서 거리를 두었던 시를 다시 꺼내 든다. 일부러 고르지 않았는데 시인 넷이 나와 마주하고 있다: 김선우, 한 강, 진은영, 김행숙. 모두 1970년생 여성이다. 앞 두 사람은 각각 1993, 1996년에 뒤 두 사람은 각각 1999년, 2000년에 등단한 뛰어난 시인들이다. 앞 두 사람과 뒤 사람은 다르다, 아주 많이. 신형철이 뉴웨이브라고 부른 뒤 두 사람, 특히 김행숙 세계로는 내 발걸음이 쉽게 진입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흔히 어렵다고 말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김선우는 내 속을 들여다보며 시를 쓰는 사람 같다. 왠지 알 듯하다.


김선우가 말했다: 시인은 자기 뼈와 살과 피를 언어하고 맞바꾸는 사람이다. 그렇게 빚어지는 시라면 쉽다 어렵다, 잘 썼다 못 썼다, 구별할 수 없다. 독자는 자기 뼈와 살과 피를 언어하고 맞바꾸지는 못할지라도 TV 시청하듯 시와 마주해서는 안 된다; 모든 시가 예쁜 꽃처럼 다가와야 한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나는 김행숙 『에코의 초상』을 대뜸 느끼지 못해서 읽고 또 읽는다; 김선우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를 대뜸 느껴서 낭송하고 또 낭송한다. 누군가 말했다: 쓰는 능력 없음에도 한사코 쓰겠다고 덤비지 마라. 읽는 능력도 문학 하는 능력이다. 그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애써서 다다른 미감, 미학, 예술 맛이 오달지지 않겠는가.


우리나라 기대 수명이 84세라니 내게 남은 시간은 15년 안팎일 테다. 이 시간 동안 한껏 세계와 생이 얼마나 찬연(燦然)하고 찬연(粲然)한지 찬연(鑽硏)하며 살아가기로 되 다진다. 소소 미미한 일상도 숙의 치료도 작심하고 숲을 걷는 일도 광화문에서 구호를 외치는 일도 미적 감흥을 일구는 예술 행동임을 자각해 실컷 펼쳐내기로 한다. 시든 노래든 그림이든 여태까지 “무심코” 해오던 데서 벗어나 “유심히” 하고, 마침내 “무심히” 하는 데까지 가보련다. 웬만하면 좁은 뜻 “예술” 가운데 하나로 다부지게 몰아보기도 하련다. 정릉 숲을 떠나면서 생애 끄트머리 궁극 깨달음은 모두 숲에서 왔다는 사실에 아연 놀란다. 깊이 허리 접는다. 봄 하늘이 푸르디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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