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보조 이야기325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by 강용원

숲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주축이다92


낙산 매자나무 그늘에서


진은영 詩 <한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부제 “위트 앤 시니컬에서”를 보았다. 처음 무슨 말인지 몰랐다. 검색하고 나서 혜화동에 있는 시집만 판매하는 서점이란 사실을 알았다. 거기에는 김선우 초기 시집이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 오늘은 위트 앤 시니컬로 간다. 일요일은 오후 한 시부터 연다니 어딘가를 거쳐 가도록 동선을 구성한다.

종묘-창경궁-위트 앤 시니컬-낙산, 이거 좋다. 마침 종묘 정전 보수 공사가 끝났다니 지난번 들어가지 못했던 아쉬움을 달랠 겸해서 거기부터 간다. 종묘 분위기가 입구부터 여느 때와 좀 다르다. 뭐지? 하고 정전 앞에 이르러보니 안팎으로 무대·조명 장치들이 자리 잡고 있다. 아뿔싸! 5월 초까지 야간 행사를 계속하기 때문에, 정전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다음을 기약하고 하릴없이 또 발길을 돌린다. 대신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에 곱촘한 시선을 두기로 한다. 아주 천천히 걸으면서 연둣빛 그들 음성에 귀를 바짝 기울여 댄다.

팥배나무꽃에 귀 붙이고 섰는데 어느 부부가 지나가며 크게 말한다: 야, 잘해놨다! 북신문(北神門) 향하는 언덕 위 벤치 몇이 놓여 있다. 거기 앉아 물 한 모금 마시며 쉰다. 옆에서 대여섯 사람 모여 왁자하게 바나나며 떡을 나눠 먹는다. 누군가 말한다: 막걸리 꺼내! 저들에게는 종묘마저 다만 놀자판이구나. 어딜 가더라도 식민지 살풍경이다.

창경궁도 오늘은 나무 꽃 품은 숲으로 기울어져 걷는다. 정조가 사도세자 사당인 경모궁-서울대병원 안에 터만 남아 있다-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자경전을 지어드렸는데 지금은 숲만 울창하다. 들어갈 수는 없어서 이슥히 들여다볼 뿐이다. 이 숲은 창덕궁 비원을 서쪽에 두고 이어져 있으며 그렇게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동남쪽으로 돌아 내려오면 끄트머리에 월근문(月覲門)을 세워두고 멈춘다. 이 문은 정조가 경모궁을 자주 드나들기 위해 맞닿은 곳에 낸 것이다. 아픈 역사가 쉽게 잊히니 또한 식민지 살풍경이다.

월근문에서 가까운 위트 앤 시니컬로 간다. 사뭇 미학적인 공간이다. 김선우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를 품고 나온다. 혜화문(惠化門) 건너편으로 낙산(駱山)을 오른다. 낙산은 나지막하나 당당히 한양도성 동쪽 내산(內山)이다. 매자나무 아래에서 세 시간이나 멍때리고 앉았다가 내려온다. 탱맑은 휴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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