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숲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주축이다93
도봉산 무수골에는 밤나무집이 있다
정릉 숲과 결 다른 울림으로 내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쳐온 숲이 도봉이다. 서울 안팎 높은 산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며리다. 자태가 아름답기로도 으뜸이다. 특히 동남쪽에서 선인봉 만장봉을 중심에 놓고 바라본 모습이 백미다. 도봉역에서 내리면 무수천과 도봉천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있다. 여기서 도봉천을 따라 올라가면 평지에서 그 모습을 얼마간 즐길 수 있다.
오늘은 그렇게 가다가 도봉천 건너 북한산 둘레길 18구간 뒷부분을 걸어 무수골로 넘어간다. 날 좋고 연휴 끼인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정말 많다. 소란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나는 무수천 작디작은 지류를 세밀하게 더듬으며 물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물 모심 하고 사진으로 기린다. 그렇게 무수천 가까이 이르렀을 무렵, 정겨운 풍경 하나가 눈길을 잡아챈다.
마치 최소한만 눈에 띄게 하겠다고 작심한 듯한 간판, 들어오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한 <영업 중>, 차림표가 없다면 음식점이라고 보기 어려울 듯한 실내 공간에 이끌려 쑥 안으로 들어간다. 사람이 없다, 주인도 객도. 계십니까, 하니 술에 잠긴 말투 사내 하나 들어온다: 햇볕 좀 쬐느라고요. 아, 저 이는 장사꾼이 아니로구나. 그러므로 마음 실어 먹을 수 있겠구나.
잔치국수와 막걸리를 청한다. 국수가 끓는 동안 막걸리와 안주를 내온다. 안주는 신김치. 오만 양념 호들갑을 사양한 무뚝뚝한 김치다. 시골 아낙이 담근 옛 김치 그대로다. 실로 할머니 이후 처음 느끼는 맛이다. 호기심이 동해 사내에게 말을 건다: 손수 담그신 김친가요? 사내는 잿빛 웃음으로 답한다: 담갔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자연 그대론데요, 뭐. 고수, 맞다.
내가 공명음을 낸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맛있게 먹으려 해요. 이런 맛이 참 맛인데 말입니다. 이어 나온 잔치국수는 잔치국수가 아니다. 모습도 맛도 김치와 같은 결을 지닌 질박한 소면 국수다. 막걸리를 더 청하자, 그는 다른 안주를 내 온다. 돌나물 물김치다. 이 또한 그답다. 단지 양파 조금과 소금만 넣었을 뿐이다. 공명음만으론 안 되겠는지 감탄사가 터진다.
그가 슬그머니 나간다. 잠시 뒤 돌아와 돌나물 물김치 위에 더덕과 오갈피 잎을 얹어준다. 텃밭에서 뜯어왔단다. 두 잎은 삽시간에 돌나물 물김치와 어울리며 눈부신 향을 뿜어낸다. 그렇다고 돌나물 향을 제압하지도 않는다. 국수와 김치와 잎과 막걸리에 도취해 나는 그만 신선이 되고 만다. 내 머릿속 상념이 사라지고 경계가 무너지는 시공이다. 실로, 오랜만이다.
어느 순간 주인장 어머니가 어깨 통증을 호소하며 나오신다. 나는 한의사임을 알리고 그 자리에서 침을 놓아드린다. 이런 경우를 위해 침을 항시 지니고 다닌다, 말하자 적잖이 놀란다. 조금 뒤에 주인장 아내가 등장한다. 남편이 얼마 전 사다리에서 굴러 허리를 다쳤다고 알려준다. 그 또한 앉은자리에서 내 침 치료를 받는다. 거리 한의사 인연은 이렇게 익어간다.
아마도 이 집 생각나 무수골에 더 자주 올 듯하다, 인사하며 일어선다. 낮술에 얼얼해진 걸음 따라 무수골로 깊이 들어간다. 너무 가팔라지기 전 적당한 냇가에서 멈춘다. 뇌와 장마저 씻어낼 물소리로 스며든다. 물에 발을 담그고 망연히 앉아 있는다. 오늘 무수골에서 보낸 반나절은 찰나마다 미학이다. 휴식을 넘어선 제의 창조다. 김선우가 더 곡진하게 읽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