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보조 이야기328

by 강용원

숲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주축이다95


정릉은 물릉이다

그동안 한양 궁궐과 종묘사직 걷기 이야기를 몇 번 들었던 옆지기가 오늘은 같이 가자고 한다. 본디 내 계획은 궁이 아니었으나 흔쾌히 생각을 바꾼다. 종묘에서 출발해 창경궁을 거쳐 후원 제외한 창덕궁까지 걷기로 한다. 옆지기 관심 수준에 맞추어 적절히 해설하며 가볍게 걷는다. 옆지기가 이런 일에 들이는 공이 본디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라 예상대로 일찍 창덕궁을 나온다. 점심 식사 시각이 아직 되지 않았으나 이 또한 생각을 바꾸어 북촌 입구 평범한 식당으로 들어가 이른 점심을 함께 먹는다. 일터로 향하는 옆지기를 배웅하고 오후 행로를 더듬는다.

새로운 탐색은 가능하지 않은 어정뜬 시간이다. 여유를 갖기 위해 일단 교보로 향한다. 읽을 책이 동나기도 했으니 말이다. 여느 때와 같이 과학 신간부터 살핀다. 눈길 끄는 책이 두어 권 있으나 살 맘은 들지 않아 돌아선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라 하릴없이 교보를 나와 나무 그늘 드리워진 쉼터 공간으로 들어간다. 한참을 멍때리다가 종각역으로 걸어간다. 이럴 땐 정릉으로 가니까. 우이신설선으로 갈아타고 가는 동안 점점 기분이 가라앉고 있음을 감지한다. 홀로 하는 일요일 걷기 기조가 흐트러진 탓인 듯하다. 여기선 옆지기도 여느 사람 같은 타자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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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으로 들어서자마자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출입구 바로 옆으로 흐르는 개울-능에선 금천이라 부른다-물소리가 단박에 내 기분을 전복한다. 흐르는 물을 보는 바로 그 순간, 아기처럼 웃고 있는 내가 내게 경이롭다. 이 경이로움은 당연히 ‘아, 내가 물을 참 좋아하는구나!’ 수준을 넘어선 감정 상태다. 그래서 다음 찰나 내게 들이닥친 느낌은 ‘아, 내가 물이구나!’다. 평생 나를 사람을 사랑해 나-사람이 된 버드나무로 여기며 살다가 칠십 줄에 마침내 나무를 사랑해 버드나무가 된 물로 여기는 데에 이른 셈이다. 그래 이 시각 이후 내 모든 순간은 물이다. 할(喝)!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걸었던 정릉을 오늘만큼은 물길 따라 걷기로 한다. 물소리가 달라지는 곳마다 멈춰서서 숨도 멈춘다. 비록 작디작은 개울이지만 한 시간 사십여 분 동안 물을 명상하며, 아니 물에 깃들어 걷는다. 달라지는 물 모습과 소리를 몸에 담고 영상으로 남긴다. 꼬마 두물머리를 기리고 그 올망졸망한 골짜기를 살핀다. 능선을 넘으며 골짜기들이 갈래 지는 형국을 통째 그려본다. 하여 물이 맥락 지은 정릉 전경을 내 몸 맘에 아로새긴다. 이렇게 또 나는 의도와 인과를 넘어서는 숲 팡이실이 덕에 인생 크낙한 새 모퉁이를 돈다. 정릉은 물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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