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4일 토요일, 교대역 9번 출구 집회 장소로 가기 위해 미도산 동남쪽 비탈을 내려가 아크로비스타 언덕을 넘는다. 아크로비스타 가까이 이르러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거기 걸맞은 코스프레 복장을 한 청년 여성 둘, 남성 하나를 본다. 저들 집회 장소와 정반대 쪽에 왜 서성이는지 알지 못한 채 관심 두지 않고 지나치려는데 갑자기 그중 하나가 인도를 가로질러 차도 쪽으로 걸어간다. 우뚝 멈춰 서더니 손 확성기를 틀고 소리친다: 윤 어게인! 자기 외침 소리를 윤석열이나 김명신이 들으리라 믿는 듯하다. 순간 나는 실소를 터뜨린다. 함께 있던 남성이 고개를 휙 돌려 도끼눈을 뜨고 나를 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덧붙인다: 쯧쯧쯧 어쩌다가···.
언덕을 내려가다 문득 묻는다: 그럼, 나는 어쩌다가···. 스물다섯 번 광장에 섰던 박근혜 탄핵 때 기록을 경신하며 오늘 스물여섯 번째 광장으로 가는 나는 어쩌다가 이런 삶을 살고 있는가? 과연 이게 내 처지와 분수에 맞는 삶인가? 정치관이나 반제 전선 같은 큰 질문이 아니라, 내 개인 생애에서 적절성과 유효성을 묻는 문제다; 변방 무지렁이로, 거의 예외 없는 익명 존재로 이렇게 살아가는 일이 과연 어떤 의미 실재를 지니는지를 묻는 문제다. 평생 되풀이하는 질문인데 오늘도 흡족한 답을 찾지 못한다. 침묵이 길어진다 싶은 바로 그때, 누군가 한 말이 떠오른다: 시인이 될 수 없다면 시가 돼라. 맥락에 맞는 말인지도 모르는데 훅 몸에 들어와 있다.
시인은 세계 슬픔과 아픔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나중까지 껴안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쓰는 시는 시 두겁을 쓴 가짜다. 가짜 시를 시라 믿고 떠들다가 개죽음하느니, 참 시인이 쓴 시를 읽고 그 시를 체현 또는 현신하는 삶으로 부단히 나아가는 편이 아름답다. 영영 미완성일 테지만 끝내 그만두지 않는 생명 음향을 울린다면 시가 된 나는 의미에 언제나 앞선다. 의미에 앞서는 시로서 나는 이렇게 익명에서 벗어난다. 내 이름은 시 속에 녹아 흐른다. 녹아 흐르는 이름이야말로 이름 본성이다. 본성 이름으로라야 이름이 선물이다. 서로 선물로 살아가는 팡이실이(hyphaeing=networking) 세계에서 시인과 시, 곧 시로서 나는 비대칭 대칭이다.
141차 촛불 대행진 대열을 따라가다가 조용히 나온다. 내 하루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다. 근처 음식점에서 저녁 식사를 한 다음 다시 아까 그 집회 장소로 가본다. 사람과 차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심히 흘러간다. 도로는 깨끗이 청소되어 있다. 쓰레기는 얌전히 있어야 할 자리에 놓여 있다. 저들 시민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는 증거다. 나는 한참이나 거기 서서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대로변 한 모퉁이에 핀 고들빼기 노란 꽃을 들여다본다. 아크로비스타 언덕 저 내란 아지트를 바라본다. 그리고 마침내 내 삶을 들여다본다. 찬란(燦爛) 자연, 참람(僭濫) 권력이 이루는 선명한 대비 경계에서 나는 다시 욕된 삶으로 나아가는 창랑(滄浪)을 당조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