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보조 이야기 329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by 강용원

숲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주축이다95


예단포 애환

지난 4년 숲에 빙의되어 그야말로 미친 듯 돌아다녔던 기억 마디가 떠오를 때마다 돋는 소름 때문에 최근 몇 주 계획 없이 편하게 돌아다니던 중 문득 깨닫는다: 위험이 예상되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 할 때 겁내고 재빨리 돌아선다면 늙어간다는 신호로 받아들여도 좋다. 마냥 이러다가는 하릴없이 폭삭 늙어 버리겠구나 싶어 한 번도 가보지, 아니 가보려 하지 않은 곳을 수도권 전철 노선 따라 살핀다. 그래, 오늘은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예단포(禮緞浦)다.

예단포는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도 동북단에 있는 조그만 포구다. 고려 때 국왕에게 바치는 예단을 싣던 곳이라 붙인 이름이라는데 예담포, 여담포, 여단포라는 다른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본디 순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옮기면서 만든 서사일 가능성이 크다. 그나마도 지자체가 벌이는 대형 수익사업에 휩쓸려 미단시티, 골든테라시티 따위 토건형 이름에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물론 내가 예단포를 찾은 까닭이 이런 역사를 살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산, 강, 내(川)가 아닌 바다를 찾다가 작고 한적하다는 느낌에 꽂혔다. 일요일이라 점심 식사 걱정을 할 정도였으니 처음 생각은 아주 단순·소박했다. 지도가 가린 군사 시설, 지도가 나타낸 개발 계획·진행 지역 점선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생각들이 모조리 뒤집어지리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제주도에 가서는 4·3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때마다 생각 놓치고 가는 타성과 같다. 부끄럽게도 내 반제 감수성은 여전히 촘촘하지 못하다.

해맑은 호기심으로 초행길 낯가림을 달래며 공항철도 영종역에서 내려 스마트폰 지도 따라 예단포로 향한다. 내가 좋아하는 대로변 소로가 있어 거기로 들어선다. 다시 대로와 만날 때까지 단 한 사람과도 마주치지 않아 더 좋아라, 한다. 야트막한 고개 넘고 나서는 예단포 선착장으로 직진하는 대로를 타지 않고 왼쪽으로 돌아 예단포 둘레길부터 찾아본다. 지도상에는 정확히 나와 있지 않다. 다행히 주민 도움으로 둘레길에 닿는다. 능선에 올라 바다와 마주한다.


예단포 둘레길에서 본 바다와 건너편 강화도 마니산

섬들로 징검다리 건너며 망무애반(茫無涯畔) 달아나는 눈길 따라 바다는 아득하게 아슴푸레하게 품을 열어간다. 숲이 살갑게 수다 떠는 엄마라면 바다는 웅숭깊게 묵언하는 어머니다. 한 찰나에 장엄해진 영혼으로 이산되어 고운 숭고로 스며든다. 이래서 바다가 그립나 보다. 매우 짧은 길이라서 도리어 충분한 자연 절창이다. 선착장으로 내려와 방파제를 향해 간다. 끄트머리 이르러 생전 처음 바다에서 ‘물 마중’을 한다. 예단포 올 첫 마음은 이로써 채워진다.

처음 한 바닷물마중

ㄱ자로 모아놓은 식당가에서 점심을 먹으며 자연 아닌 예단포는 이미 자본으로 칠갑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손을 뜨내기로 대하는 음식이 그 증거다. 낮술에 얼얼해진 마음을 달래며 또 바닷가로 간다. 생전 처음으로 밀물이 들어오는 광경을 지켜본다. 되풀이해 늘 일어나는 소소 일상이 뭍 사람인 내게는 경이롭다. 포구를 떠나며 기획된 거리와 건축물을 휭하니 돌아본다. 그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보도블록 틈새에 실 숲 이룬 풀들을 기이한 눈길로 본다.


밀물

이 풀들은 거대한 프로젝트가 실패했다고 증언한다. 인천광역시 중구 운북동 이른바 운북복합레저단지 개발사업은 지난 20여 년 동안 개발 계획은 25회, 실시 계획은 24회나 변경됐다. 지지부진했다는 증거다. 현재 상황은 정확히 모르지만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자연과 마을공동체를 무참히 파괴한 채 덩그런 폐허로 남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예단포 원주민은 뿔뿔이 흩어졌다. 남은 한 줌 사람들은 그저 마지못해서 살아가고 있다.

제국주의 부역 토건족 강도질이 어디 여기 예단포뿐이겠는가. 온 국토가 테라포밍 대상이다. 온 민중이 수탈 대상이다. 앵글로아메리카 제국이 거북섬-북미 대륙을 토착민은 이렇게 부른다-과 토착민에게 자행한 정착형 식민주의가 이 땅 곳곳에서 목하 진행 중이다. 숲과 바다, 그리고 인간 사회 어디를 가든 제국주의 살해와 착취를 피해 갈 존재는 없다. 바다가 숲이 깨달은 인간과 동지일 수밖에 없는 며리다. 예단포 바다, 숲, 슬픈 사람에게 큰절하고 돌아선다.

사실상 폐허인 예단포 토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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