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부역 정권 수괴가 일으킨 친위쿠데타를 저지하고 치루는 대통령 선거 투표일이 코앞에 다가온 오월 말일 나는 여느 때와 똑같은 발걸음으로 광장을 향한다. 광장은 김명신 부부와 판검사가 서식하는 서초동이다. 그래서 여기에 모인다. 이렇게 시민이 모이는 광장은 공간(space)이 아니라 장소(place)다. 장소는 생생한 몸 경험이 의미·지향·소통·실천을 구성할 때 비로소 만들어지는 특별한 사건 영역이다. 장소에서는 모르는 사람끼리도 이어져 있지만, 공간에서는 아는 사람끼리도 끊어져 있다. 우리 장소, 장소 우리는 오늘 공생 팡이실이(hyphaeing=networking) 또 하나를 창조해 간다. 몰라도 이어진 사람들을 나는 좀 더 촘촘한 눈길로 본다.
지난 반년 동안 광장에서 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람을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죄다 모르는 사람들인데 같은 구호를 외치고 같은 노래를 부르며 같은 율동을 한다. 각자 지닌 곡절은 더 다양하겠지만 결 같은 목표를 향해 공동체로 서로 빚어간다. 가벼운 눈인사조차 나누지 않는데도 여기 당연히 있어야 할, 있어서 자연스러운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같은 리듬을 탄다. 목소리도 몸짓도 ‘끼’도 천차만별인 채로 우렁찬 함성 하나를 창조한다. 전체 흐름을 따라가는 사이 짧지만 응축된 시간 빛에서 나는 주위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핀다. 광장 경험은 내 선택이 홀로 주도해 구성할 수 없다. 남들 파동에 몸을 내맡겨서 직조된다. 광장 경험은 예술 행동이다.
예술 행동은 구겨지고 접힌 생명과 진실을 펴고 펼치는 사회 행동이다. 사회 행동이어서 아름답다. 해학 오달진 피켓 만든 소녀가 아름답다. 준엄한 깃발 세워 흔드는 청년이 아름답다. 사회·정치 메시지를 간직한 배지와 리본을 빼곡하게 단 백 팩을 멘 중년이 아름답다. 걸판지게 막춤 추며 돌아다니는 장년 승려가 아름답다. 회백색 수염 겨우 흔들 만큼 나지막이 노래 부르는 변방 노인, 나도 아름답다. 무심히 지나치는 행인마저 이 아름다움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광장 미학이다. 미학 일으킨 이 광장은 도로명에 갇히지 않고 숭고한 새 이름 열어 길이 기려지리라. 비록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지라도 자주 민주 어느 날이 올 때 광장은 운명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