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숲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주축이다96
“강력한 시간”
내 옹근 반인간중심주의가 여간해서는 도시와 문화 속에 깊숙이 몸을 밀어 넣지 못하도록 막아 온 세월이 제법 길었다. 숲과 물에 빙의된 상태일 때 나는 급기야 위대한 예술조차 하찮게 여겨 꽤 오랫동안 멀리한 채 살았다. 숲과 물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주축이라 생각했으니 그럴 만하다. 요사이 자꾸 예술이나 미학을 이야기하게 된 변화에 주의를 기울인다. 내가 아니라 공생하는 미소 생명들이 이끌고 있다는 직감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내가 어떻게 반제 전선을 형성해야 하는지, 그 상태함수를 숙의하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하여 오늘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부터 가기로 한다. 어디 있는지만 알고 있을 뿐, 그동안 들어가 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물론 내 예술 감수성 또는 미학 직관이 현대미술에 가 닿을 수 있는지, 있다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한다. 정색하고 관심을 두거나 본격 대면을 하지도 않았다. 일단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그냥 마주해 보기로 한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묻지 않는다. 가면 뭔가 전언이 있지 않겠나 싶다. 뭐, 없어도 상관하지 않으리라. 살면서 마주하는 일들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가. 망설임이 걸음을 재촉한다.
통합관람권을 들고 1층 1전시실에서 출발해 지하 1층 2~7전시실까지 돌아본다. 익히 들어본 김환기나 백남준을 제외하면 대부분 알지 못하는 미술가로 가득 차 있다.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지만 음성, 음향, 음악, 영상, 문자 따위를 이용한 복합 미술 작품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예술다운 예술은 이해하기 전에 몸으로 들어온다든가. 홀연히 어떤 작품 앞에 못 박힌다. 난민 문제를 다룬 다큐 형식 복합 미술이다. 모든 사람이 보다가 중간에 가버리는데 신기하게 나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앉지도 못하고 서서 끝날 때까지 뚫어져라 본다.
지금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 작품 앞에서 나는 어떤 새로운 예술 경험에 가 닿았음이 분명하다. 크리스틴 로젠이 말한 “강력한 시간”으로서 생명, 그러니까 생존이 숨 막히게 작동하는 그런 단도직입 경험 말이다. 강력한 시간을 견인하는 예술은 결코 고상한 취미가 아니라 생사를 건 저항이다. 생사 건 저항으로서 이 작품은 ‘이종 교배를 통해 거룩한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라는 결말에 도달한다. 이 결말은 최근 몇 해 동안 내가 숲과 물 걷기로 증득(證得)한 결론에 빅뱅을 일으킨다. 예술이 요구한 바에 응할 때 일어나는 난리다.
난리로 생을 격동하는 일이 예술에 부여된 의무며 권리다. 문화로서 예술이 자연으로서 숲과 물에 어떻게 “따로 또 같이” 어우러지는지 실감하면서 얼얼한 심장을 그대로 안은 채 나는 종묘로 향한다. 종묘는 이제 내게 역설 지성소로 웅숭깊게 자리 잡아서다; 장엄한 미학과 웅장한 숲이 신묘한 공생을 이루는 시공이어서다. 놀랍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오늘 종묘는 나를 “강력한 시간”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 시간 속에서 끈덕지게 기다린 끝에 인적 없는 정전 전경을 포착한다. 그 문화 예술을 품은 숲은 다시없이 깊은 자연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