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보조 이야기331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by 강용원

숲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주축이다97



초월과 관통


오늘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으로 간다. 지하철역에서 걸어가려 했지만 날씨가 후덥지근해 셔틀버스를 탄다. 거리가 제법 된다. 버스 안에서 생각한다. 청계산 자락에 있고 관악산이 건너다보여 주위 풍경은 아름다우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은 접근이 그리 쉽지 않다. 법원·검찰청이 거만하게 버티고 있는 서초동 미도산 같은 좋은 곳이 실은 이런 예술·미학을 위한 터전이었어야 한다. 우리 지배층 사고방식은 거꾸로다. 식민지 특권층 부역 집단이 지닌 배냇적 고질이다. 푸르디푸른 숲을 보면서도 심사가 바로 펴지지 않는다. 느낌이 뭔가 무겁고 어두운 쪽으로 흐른다.




처음 마주한 <드라마 1882>는 이집트 출신 복합 미술가 와엘 샤키 작품이다. 영·불 제국에 대항하여 일으킨 민족주의 운동인 우라비 혁명(1879~1882) 이야기를 다룬 오페라 형식 영상물이다. 140여 년이 지난 2024년에 그가 이 작품을 만든 목적 또는 계기가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앵글로아메리카 제국 꼭두각시 네타냐후가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에 광분하는 현장이 이집트하고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런 한 제국주의 화두는 언제 어디서나 현재진행형이다. 러·우 전쟁도 김명신·윤석열 일당과 우리 싸움도 배후는 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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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거부하는 조종사에게 보내는 편지>는 레바논 출신 복합 미술가 아크람 자타리 작품이다. 1982년 일어난 레바논·이스라엘 전쟁에서 레바논 사이다 시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 조종사가 항명하고 폭탄을 바다에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만든 영상·설치물이다. 전쟁 탓에 적대 관계에 놓인 두 사람이 그 갈등을 가로질러 인간 존엄과 가치 윤리를 지켜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친위쿠데타를 겪은 시민인 나는 수괴가 내린 명령을 거부한 비육사 출신 장교, 출동했으나 편의점에서 라면 먹으며 적극 행위를 거부한 사병을 떠올린다. 나도 편지를 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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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전혀 뜻밖이다. 처음 찾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외국 그것도 매우 낯선 나라 이집트와 레바논 예술을 만나다니. 더군다나 그 예술이 내미는 다르면서도 같은 요구에 가슴을 활짝 열다니. 이런 복합 미술 대면은 지난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본 일과 더불어 생애 최초 경험이다. 이걸 정말 “경험”이라 할 수 있을까? 크리스틴 로젠의 말처럼 “사본”일 따름 아닐까? 아직은 내가 스스로 판단할 때가 아니어서 누구 답도 기다리지 못한다. 그냥 놔둔 채 오늘 겪은 “강력한 시간”만을 기억한다. 그저 출발점에 섰을 뿐이다. 서둘러 시늉 짓다가 그만두면 망한다.




<젊은 모색 2025>는 오늘날 우리가 마주해야 할 기술 시대 건너가기, 비인간·비생명과 관계 맺기, 타자 특히 소수자 포용하기, 돌봄·환대를 사유하고 실천하기에 자유롭고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는 신진 작가들이 모인 장이다. 매체 간 경계를 가로질러 넘나드는 분방한 조형이 흐드러지다. 저들이 고민하는 문제들을 살피다가 역사 변화 선두에 예술가, 특히 미술가들이 서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몸으로 알아차린다. 결국 예술은 본디 그런 지향을 드러내는 사건일 수밖에 없다는 데까지 각성이 미친다. 그 지향이 내 관심사와 같은 결을 지닌 두 사람을 만난다.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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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을지로 작가는 현실과 가상, 물질과 비물질 간 서로 다른 작동 방식을 쌍방향 관통시키는 시도를 3D 애니메이션, 증강 현실(AR) 같은 미디어로 보여준다. 그가 보기에 3D 그래픽이 곰팡이 증식, 식물 생장 작동 방식을 닮았기 때문에 이 작업은 유의미하다. 난초가 지닌 생물학적 속성과 표면 묘사를 디지털 기술로 중첩한 작품들은 보는 이에게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모호성을 견디도록 요구한다. 우리가 이미 이런 세계에 깊이 들어와 있으므로 단순 배척은 불가하다. 그러나 모종 곤경이기도 하니 단순 수용은 위험하다. “강력한 시간” 속에서 미학을 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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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나 작가는 자연 내부, 특히 식물 뿌리와 곰팡이를 포함한 미생물 공생 구조와 이를 닮은 인체 내부 미시 구조를 묘사해 유형에서 무형을 끌어내고 나아가 인간과 비인간, 유기체와 비유기체, 생명과 비생명 사이 경계를 허물어 존재 상호 간 네트워킹을 펼쳐 보인다. 화포나 목판에 물감을 층으로 쌓은 뒤 인두로 긁어내는 기법으로 화면과 대상 모두에 생동감을 부여했다고 한다. 김을지로 작가와 사뭇 다르지만, 깊은 지점에서 만난다고 느낀다. <젊은 모색 2025>에서 두 작가만 이야기한 까닭이 여기 있다. 다시 한번 가보고 더 핍진한 서사를 구성해야 할 듯하다.




마지막으로 한국 근현대 미술 상설전을 본다.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 가진 사람이면 다 알 만한 거장들이 대거 등장한다. 나는 저들 그림에서 거의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저들이 살았던 근현대가 어떤 시대인지 저들 그림은 묘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법을 빼면 시대적 고민이라곤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컨대 삼척동자도 아는 이중섭, 그 거장 그림에 국권 상실기 서사는 어디에도 없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을 나서며 상념에 잠긴다: 시대를 초월한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 초월 아닌 관통이 요구되지 않는가? 이 또한 누구 답도 기다리지 못하며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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