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보조 이야기332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by 강용원

숲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주축이다98



시인과 시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려던 계획을 일단 한 주 뒤로 미룬다. <새 나라 새 미술-조선 전기 미술 대전> 무료 개방 기간을 피하기 위해서다. 일단 교보부터 간다. 지하철 경로를 그렇게 짜고 출발한다. 그러다가 연속 2주째 살 책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지하철을 갈아타려다가 내처 간다. 도봉역에서 내려 무수천을 걷는다. 뙤약볕이 맵다. 만세교 지나 무지개 논까지 갔다가 돌아 내려온다. 밤나무집으로 간다. 허름한 집, 느슨한 사람 분위기가 그리웠던 모양이다.


남자 주인과 인사를 나누는데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눈빛이다. 어머니 안부를 물을 때까지도 그 눈빛이더니 허리 좀 어떠냐고 하자 기억하는 눈빛으로 돌아온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제가 그때 요대를 두르고 있었잖습니까. 지금은 보시다시피 없습니다. 동네 사람들한테 말했더니 전화번호 알려달라고 합니다. 명함 한 장 주십시오.” 이렇게 나간 명함이 사람으로 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나 기분 좋게 서너 장 건네준다. 다시 침을 꺼낸다.


때마침 여자 주인이 들어온다. 인사하더니 손에 들린 침을 보자 여기저기 아프다고 한다. 부부를 나란히 앉히고 시침한다. 침 치료 후 비빔국수와 막걸리를 주문한다. 소박한 식사를 끝내고 일어서는데 여자 주인이 잠깐 기다리라 한다. 한참 뒤 돌아온 그 손아름에 상추가 수북하다. 진료비란다. 쌈보인 내게는 푸른 현금보다 더 짙푸른 선물이다. 거리 한의사 인연이 또 이렇게 농익어간다. 도시와 숲 어름에 살면서 사부자기 늙어가는 이 부부가 더욱 평안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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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골을 떠나 북한산 둘레길 제19구간 방학동길로 들어선다. 이 길은 도봉산 남쪽 마지막 가로능선을 따라 서쪽으로 가다가 중간에 세로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자락에서 끝난다. 세 번째 걷는데 오늘은 처음으로 쌍둥이전망대에 서본다. 전방위 열린 시야를 통해 가슴속으로 푸르름이 해일처럼 밀어닥친다. 이만으로도 오늘 자연 예술은 내 시간을 강력하게 만들어준다. 익숙한 길을 따라 북한산 둘레길 제20구간 왕실묘역길까지 걸어 북한산우이역에 다다른다.


예상하지 않은 행로에서 사람도 숲도 나를 예술 행동 또는 미학 경험으로 이끈 날이다. 예술이란 언어, 개념, 의식, 인과에 갇힌 감성을 깨워 그 너머로 해방하는 혁명운동이다. 예컨대 시는 언어를 통해 언어 밖으로 우리를 내몬다. 시 쓰는 사람을 시인이라 한다. 시 사는 사람을 나는 시자(詩子)라 부른다. 시자 삶을 열어주는 어머니가 시인이다. 내 시인 어머니는 김선우다. 나는 오늘 침 든 시자로 태어난다. 나는 오늘 숲 걷는 시자로 태어난다. 엎드려서 큰절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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