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숲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주축이다99
또는 예술 또는 자연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람객 수로 세계 6위라 한다(2023년 통계). 중국이나 인도같이 오랜 역사는 물론 엄청난 인구를 거느린 나라 어떤 박물관도 들지 못한 순위다. 왜 그런지 구체적으로는 모른다. 그래도 날 좋은 일요일이라면 의당 시장통처럼 붐비리라는 예상쯤은 하고 간다. 내가 보려고 하는 <새 나라 새 미술> 전은 유료라 덜하겠거니 하지만 그마저 알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이촌역에서 국·중·박으로 바로 가는 지하도부터 이미 사람이 많다. 경내로 들어가니 드넓은 공간에 인파가 겅성드뭇하다. 막상 보니 그도 그럴 법하다. 어린이박물관과 한글박물관을 더불은 데다가 카페, 식당, 극장, 도서관, 나아가 가족 공원까지 품어서 예술 경험은 물론 여가까지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중심이므로 사람이 국·중·박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다.
애당초 내가 온 목적은 <새 나라 새 미술> 전이니 바로 그리 들어간다. 고려를 살았던 사람이 새 나라 조선에서 새 이념을 받아들여 살아갈 때 어떤 변화를 담아내는지, 그 변화는 어떻게 여물고 또 가지 치는지 보여주겠다는 기획전이다. 아주 낯설거나 난해한 화제가 아니라고 판단해 편하게 접근한다. 물론 무의식에는 어떤 도발과 충격에 맞닥뜨리고 싶은 충동이 있겠지만.
사실 내 관심은 상반된 둘이다: 하나는 유교 이념을 상징하는 백자다. 둘은 억불숭유라고는 하지만 맥맥한 저류 불교가 빚어내는 불상 또는 불화다. 그런데 의외다. 처음 보는 청곡사(靑谷寺) 청동은입사향완(靑銅銀入絲香椀)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일 년 뒤 명복을 빌고자 제작했다. 필경 신덕왕후에 대한 내 개인적 흠숭이 빚어낸 관심일 터이다.
신덕왕후는 태조대왕 계비이자 조선 최초 왕비로서 건국에 기여한 바 크다. 이를 기리기 위함인지 향완 왼쪽에는 생명, 어머니를 상징하는 산스크리트어 म (ma)를, 오른쪽에는 우주 진리나 회통을 상징하는 산스크리트어 अं (aṁ)를 새겨 넣었다. 정사 기록이 아닌 제의 차원에서 행해진 흠숭이 오히려 사실성을 증강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매혹이 실용을 예술로 드높인다.
다음으로 다가온 경외는 경이로운 불상이다. 조계사(曹溪寺) 목조여래좌상(木彫如來坐像)이다. 조선 전기(15C) 명나라를 통해 들어온 티베트 불교 영향을 받은 불상으로 날렵한 균형미와 섬세한 자연미가 극한에 가까운 세련미로 수렴한다. 한참 동안 그 앞에 못 박힌 듯 서서 생각에 잠긴다: 저 불상을 조각한 사람은 자신이 예술 한다고 자각했을까? 이 질문은 자체 오류다.
사실 예술이란 말을 오늘날처럼 쓰는 일은 오직 오늘날뿐이다. 모든 개념은 역사 소산이다. 다음에 내 눈길을 끈 백자를 본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아니 그럴 필요조차 없을는지도 모른다-백자병이다. 아무것도 없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표면 전체가 매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멍 또는 흠도 많다. 오늘날 도예가라면 결코 이렇게 만들지 않는다. 왜? 그는 “예술가”니까.
저 뜨르르한 백자철화승문병(白磁鐵畵繩文甁)을 본다. 전문가들이 쏟아낸 극찬을 듣고 다시 보면 도리어 평범하다. 아니, 쓱쓱 그리고 만들었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숙련된 도공 손길과 “예술가” 경지가 동의얼까? 답을 기다리지 않는 의문이 깊어진다. 더 나아가 묻는다. 내가 여기 온 목적, 그러니까 예술 경험이란 무엇인가? 향완이 불상이 백자가 과연 예술(품)이기는 한가?
답을 모른 채, 누구 답도 기다리지 못한 채, 하릴없이 다시 자문한다: 예술은 과연 무엇인가? 일단 내가 빙의되지 않는 예술은 예술이 아니다, 정도까지에만 가 닿는다. 빙의란 내 의식 자아가 사라지는 상태다. 내가 예술 사건으로 스며들어가 녹아버림으로써 형체 의식이 소멸하는 상태다. 아니다. 예술 사건이 내 의식을 해체하고 무의식 각성을 유발해 나를 변혁하는 상태다.
오늘 국·중·박 행동은 예술 경험을 일으켰나? 국·중·박 떠나 나는 어떤 숲을 걷는다. 참나무 한 그루가 길을 가로막고 누운 곳에 이른다. 관리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나무를 붙잡아 달라고 청한다. 베어버릴 작정이다. 나는 일단 무게 나가는 가지부터 쳐보라 권했다. 가벼워지면 일어서리라 예상해서다. 그렇게 됐다. 나무 한 그루 살렸다. 대체 누가 나를 이리로 이끌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