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보조 이야기335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by 강용원

숲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주축이다101


다시, 또는 예술 또는 자연


처음 국·중·박을 찾았을 때, ‘와, 사람 참 많네!’ 했던 생각이 다시 찾으면서는, ‘많아도 너무 많네!’ 하고 바뀐다. 얼마 전 국·중·박 관람객 수가 2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정말,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몰려들까? 구불구불 늘어선 줄이 워낙 길어 들어가기를 일단 포기한다. 으뜸홀을 나와 승탑, 석등, 비석이 전시된 인적 없는 바깥 공간으로 간다. 이어서 석조물 공원으로 조성한 숲으로 들어간다. 용산 가족 공원 일부를 걸은 다음 박물관 전체를 한 바퀴 도는 숲길을 따라와 다시 으뜸홀로 들어간다. 그나마 줄이 짧아져서 이번에는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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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중·근세관으로 들어가 주로 청자와 백자에 눈길을 주며 천천히 걷는다. 이 수려 또는 담백한 도자기들은 본디 감상 또는 소장만을 목적으로 만든 “예술품”이 아니라 생활용품이었을 테고, 당연히 “예술가” 아닌 국가 또는 관 소속 도공이 만들었을 테다. 도공은 오늘날처럼 문화 중심과 상층에 그 위상이 놓인 명예로운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들이 만든 생활용품을 오늘날 우리는 “예술품”으로 찬탄하며 이렇게 특별한 장소에 모셔놓고 기리어 본다. 이 문제는 예술가, 예술품을 포함한 예술 개념 전반에 관한 이전 변화를 넘어 향후 변화를 사유하도록 이끈다.


오늘날 주류 예술은 문화 중심·상층에 군림하는 소수 “예술가”가 독점하고 대다수 비예술가는 돈 주고 소비하는 일방 관계에 놓여 있다. 제국주의 생활양식 가운데 중요한 한 면모다. 창작이라 하는 예술 행동도 감상이라 하는 예술 행동도 이런 식이라면 이는 참 예술이라 할 수 없다. 예술은 고상한 경지가 아니다. 예술은 생존을 위한 사회 생물 행동에서 발원한다. 사회 생물 행동은 거대 파충류를 피해 도망친 패자 포유류가 살아남으려 적응한 공생 진화 소산이다. 공생 진화는 상호작용이다. 창작자와 감상자가 상하, 능수로 분리된다면 이는 상호작용이 아니다.


상호작용을 근원에서 톺을 때, 이렇다: 창작자는 감상자를 포함한 생태 조건과 더불어 창작한다; 감상자가 창작에 이미 개입해 있다. 생태 조건이란 감상자 인간은 물론 창작자를 둘러싼 날씨, 빛, 소리, 냄새, 음식, 손에 닿는 사물, 장소, 도시, 마침내 숲에 이르기까지 온갖 환경이 건네는 감각, 감정, 인지, 정보, 지식, 상상, 상상 너머 영성이다. 이들 모두가 창작 공동 주체다. 나는 이른바 “예술가”가 아니다. “예술”로서 글을 쓴다는 통념 없이 글을 쓴다. 그런데 내가 나 홀로, 내 능력으로 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 무엇인가 언제나 함께함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나지막한 가장자리 틈새 사람으로 한 생을 살아간다. 그래서 차마 말할 수 있다. 나지막한 가장자리 틈새가 예술이 일어나는 시공이라고. 이제 여기서 있는 듯 없는 듯 들리는 저주파 소리를 듣지 않는 “예술”은 폭력이자 질병이다. 상생과 치유를 향한 발걸음으로 나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가 지니는 미학을 가로질러 가 국·중·박 건물 바깥 엉성한 보도블록 사이 작디작은 풀들에 “강력히” 주의한다. “예술” 지성소 변방에 피어난 잡초가 예술 본진이다.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경이와 경외를 경험한다. 국·중·박 떠나니 국·중·박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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